자연에 상상을 그리는 아티스트, 코스 설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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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에 상상을 그리는 아티스트, 코스 설계가
  • 서민교 기자
  • 승인 2024.04.09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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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의 초목 지대, 바닷가 옆 모래사장, 산악 지대, 드넓은 초원, 사막 그리고 밀림….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하는 공간, 이런 곳에서 어떻게 골프 코스가 탄생할까. 코스 설계가는 상상한다. 그리고 수십, 수백 번을 그린다. 머리로, 또 손으로. 무한한 자연에 끊임없이 상상을 덧칠하는 작업, 이것이 코스 설계다.

4평 남짓 될까. 그의 작업실은 켜켜이 쌓여 있는 기름종이들, 구석구석 돌돌 말려 있는 종이 뭉치들, 아트 박스를 옮겨놓은 듯한 가지각색 필기구들, 그리고 수십 년 세월의 흔적을 품은 낡은 수제 필통 등이 어우러져 코스 설계가의 공간임을 한눈에 보여준다. 이 조그마한 공간에 땅과 바다, 숲과 호수가 펼쳐지고 그 위에 골프 코스가 슬며시 자리를 잡는다.

이곳은 한국 코스 설계 2세대이자 우리나라 대표 코스 설계가로 각광받고 있는 노준택 로가이엔지 대표의 작업 공간이다. 클럽72(구 스카이72) 하늘 코스, 웰링턴, 설해원 올드 코스, 이천 마이다스, 베어크리크 춘천, 성문안 등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이곳은 모두 그의 손을 거쳐 탄생한 골프 코스다. 그의 상상력이 펼쳐지는 이 공간에서 그가 그리는 골프 코스 설계도를 엿봤다. 지도 위에 어지럽게 덧칠한 설계 도면을 펼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땅과 교감하고 지형을 읽어내는 눈, 나는 이 과정에 가장 많은 시간을 쏟는다. 골프 코스는 이 시간에 결정되니까.”

노준택은 최근 작업 중인 골프 코스 설계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면서 1/5000 축척의 수치 지도를 펼쳤다. 수치 지도에는 도로·철도·건물·하천 등 다양한 인공 지물과 자연 지형이 도식과 3차원의 위치 좌표로 표현되어 있고, 등고선과 표고점·능선을 포함한 지형 레이어와 호수·저수지·해안선 등의 경계 레이어가 표시되어 있었다. 그는 잠시 동안 수치 지도를 뚫어져라 쳐다본 뒤 말했다. “이게 부지 관련 기관에서 제공받은 기본적 자료다. 이렇게 딱 지도를 펼쳐놓고 이 땅이 어떻게 생겼는지 읽어내는 작업을 한다. 지형도를 통해 먼저 땅에 대한 해석을 하고 이 공간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해 거꾸로 상상을 한다.” 코스 설계가마다 다르겠지만, 그가 직접 부지를 보기 위해 현장을 찾는 것은 검증 단계다. 실사로 땅을 먼저 보게 되면 땅을 읽어내기 쉽지 않은 데다 산악 지형의 경우 나무로 빼곡히 가려져 있어 근거리밖에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원하는 그림을 얻어낼 수 없다.

골프 코스가 들어갈 부지에 설계가가 설계한 코스가 들어서기까지는 환경 검토 및 허가 등 법적 절차상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골프 코스로서 가능한 지형인지 분석하고 법적 문제가 없으면 골프 코스 설계가 실질적으로 이뤄진다. 이를테면 18홀 혹은 27홀 규모가 가능한 부지인가부터 파악하는 식이다. “기본적인 제약 사항을 확인한 뒤에는 오직 골프 코스를 그리는 것에만 집중한다. 이 지역을 어떻게 활용하면 땅을 잘 쓰고 코스를 배치할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그래서 지형을 읽는 작업이 가장 중요하다. 설계가마다 지형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코스는 완전히 달라지기도 하고, 또 정확히 분석해야 그 땅이 가지고 있는 특성을 고스란히 코스에 담을 수 있다.” 단순히 아무것도 없는 땅이나 매립지라면 설계가 마음대로 코스를 디자인할 수 있지만, 산악 지형이나 복잡한 지형의 경우 코스 설계가의 해석에 따라 다양한 루팅 플랜이 나올 수 있다. “내가 지형도를 오래 읽는 건 땅과 교감하며 지형을 읽어내기 위함이다. 수십, 수백 가지 루팅 플랜을 검토한 다음에야 ‘최고야’라고 할 수 있는 최적의 코스가 나올 수 있다. 지금도 작업하고 있는 코스 설계 가운데 확정하지 못한 플랜이 있는데, 여전히 땅만 보며 계속 고민하고 있다.” 

창작이라는 작업이 그렇듯 코스 설계도 마찬가지다. 무릎을 탁 치며 나오는 코스가 있는가 하면, 몇 년을 고민하는 경우도 있다. 평균적으로 3~6개월 정도로 코스 설계 기간을 잡지만 짧게는 1개월, 길게는 2년까지 걸리기도 한다.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이유는 코스 설계가 단순히 도면 위에서만 펼쳐지지 않기 때문이다. 부지에 골프 코스 배치가 가능한지 여부부터 설계가 시작되고, 인허가 문제로 또 시간이 소요된다. 법적 절차를 진행하는 기간은 온전히 코스 설계가의 시간이 되기도 한다. “사실 나는 시간이 많다. 결과적으로 시간이 부족한 파트는 마지막 단계에 공사용 설계를 하는 사람, 착공에 들어가야 하는 사람들이 급해진다. 골프장 오픈 날짜를 잡아놓고 빨리 공사용 도면을 내놓으라고 독촉하기 마련이다. 그때까지 약 1년~1년 반 정도는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충분하다. 이후 설계도에 맞춰 실제로 반영될 수 있도록 현장 기술 지도를 하면서 많은 일이 이뤄진다.”

코스 설계는 아웃 코스와 인 코스의 루팅 플랜이 있듯 클럽하우스 부지 선정부터 이뤄지곤 한다. 코스의 루트가 풀리는 시작이자 끝인 셈이다. 코스가 들어설 수 있는 가용지가 나오면 클럽하우스를 어디에 배치하면 가장 적합할까를 고민한다. 어느 땅은 진입 도로를 고려해 클럽하우스로 쓸 땅이 하나밖에 없는 곳이 있고, 또 두세 가지 경우의 수가 있다. “클럽하우스를 중심으로 코스 배치가 적합한지 따져보는 것이다. 18홀 코스 배치가 가능한 완벽한 루트를 하나 찾아놓고, 또 다양한 플랜을 상상하고 앉혀본다. 클럽하우스에서 펼쳐지는 경관을 첫 번째 경관으로 정한 다음 하나씩 풀어나가면서 어디서 출발하면 좋을지 따진다. (펼쳐진 설계도를 가리키며) 이 땅의 경우 클럽하우스를 정하고 가려진 작은 능선을 따라 분지로 갔다가 산을 돌아 들어오면 재미있겠구나 상상하며 1차적으로 18홀 배치가 가능한 뼈대를 구성한다. 그리고 다시 이런 작업을 수없이 반복하며 머릿속으로 성토와 절토를 해보면서 최적의 위치를 잡아나간다. 그렇게 하다 보면 똑같은 땅인데도 어떻게 쓰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코스가 그려진다.” 

18홀 배치가 나오는 뼈대가 어느 정도 잡히면 1번홀부터 18번홀까지 홀 배치를 구성한다. 뼈대에 살을 붙이는 작업이다. 즉 전략적인 코스 구성을 위한 홀별 배치다. 홀의 길이나 좌우 도그레그 홀, 아일랜드 그린이 있는 홀, 심한 내리막 홀 등 이 땅의 장점을 최대한 끌어올릴 수 있는 경우의 수를 찾는 과정이다. 그가 작업 중인 설계도 여유 공간에는 ‘434453454 443544435’라고 표시된 숫자가 있다. 1~18번홀 파3, 파4, 파5 구성을 해놓은 것이다. 이때 반드시 순서대로 설계를 하는 것은 아니다. “설계를 하다 보면 단순한 지형이 있고, 재미있는 지형이 있다. 지형 기복이 크고 변화가 심한 곳이 재미있는 지형이다. 산을 넘고 돌아가거나 골짜기를 따라가다 암벽을 만나기도 한다. 오크밸리의 경우 초반 나인홀은 단순한 지형이고, 후반 나인홀은 다변화하는 지형이다. 이럴 때는 홀을 거꾸로 설계하기도 한다. 재미있을 것 같은 특수 지형을 발견하면 몇 개 지점을 먼저 정하고 거기서 출발하기도 한다. 오르막과 내리막을 상상하며 티 샷을 날려보기도 하면서 퍼즐을 계속 맞추는 것이다. 이 단계를 놓치면 나중에 다시 할 수 없다. 나와 땅이 대화할 수 있는 가장 편안한 상태, 이때 루트 정리를 최대한 많이 해봐야 한다.” 

그의 작업실에 켜켜이 쌓여 있던 기름종이가 바로 그런 흔적들이다. 이 땅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상상해 그려보고, 몇 가지를 추려 풀어놓고, 지형도에 올려놓고 또 보는 것이다. “그런 다음 이걸 가지고 어떤 게 더 나을지 상상 속에서 플레이를 한다. 그러면서 또 장점을 찾고 새로운 퍼즐 조합을 맞춘다. 때로는 마지막 단계에서 사업주와 함께 고민하는 경우도 있는데, 사실상 이 땅에 대한 공감대를 얻어낸다고 보는 게 적절하다. 결국 코스에 대한 답은 설계가가 내게 되니까.” 게으른 설계가는 ‘내가 한 게 최고다’라며 한번 정한 루트를 바꾸기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계속해서 화장을 하고 치료도 하는 부지런한 설계가가 최적의 코스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골프 코스 설계도에도 정해진 규칙이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없다’. 그는 ‘골프 코스는 정해진 규격이 있지 않다’고 강조했다. “사업주를 비롯한 비전문가에게 공유하는 설계도는 모든 고민이 끝났을 때 두세 가지로 알아보기 쉽게 만든다. 내가 고민했던 수많은 설계도는 지금 여기 있는 사람을 빼고는 누구도 볼 수 없다. 예전에는 100% 수작업으로 만들었다. 트레팔지라는 아주 두꺼운 종이에 최대한 모든 걸 표현해서 청사진으로 구워 배포했다. 하지만 요즘은 설계도를 그린 뒤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도면화하고 시뮬레이션을 한다. 이제는 수작업만으로는 비전문가와 공감하기 어렵다.” 하지만 여전히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설계가의 코스를 완벽히 구현해내긴 힘든 실정이다. 

코스 설계가가 최고의 설계도를 완성하더라도 그 코스가 그대로 구현되기 위해서는 마지막 작업이 남아 있다. 실제로 지형에 코스를 입히며 조형을 만드는 셰이핑 작업이다. 1m의 높낮이 차이가 코스를 전혀 다르게 바꿔놓을 수 있기 때문에 코스 설계가는 현장 기술 지도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고정관념이 있는 셰이퍼도 있고, 코스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셰이퍼도 있다. 설계가가 원하는 조형선을 만들기 위해서는 셰이퍼와의 공감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결국 코스 설계가의 손길은 마지막 공사 작업 순간까지 이어진다. “어떤 때는 ‘셰이퍼가 내 아바타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진=윤석우(49비주얼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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