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터스 역대 ‘최고의 오거스타’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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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터스 역대 ‘최고의 오거스타’를 찾아서  
  • 서민교 기자
  • 승인 2024.04.12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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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번홀(1998년).
16번홀(1998년).

오거스타내셔널은 1934년 첫 마스터스를 치른 이후 지속적으로 진화해왔다. 그렇다면 어느 버전이 최고일까? (힌트: 지금 코스는 아니다.) 

오거스타내셔널의 독특한 점이라면 그동안 여러 가지 변화를 시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이 코스를 바라보는 인식은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1934년 3월 첫 마스터스가 개최된 이후 그린 주변을 다듬는 수준부터 여러 홀의 대대적인 재구성에 이르기까지 거의 오프 시즌마다 손을 댔다. 프로 게임의 발전에 발맞추기 위한 의도였던 이런 변화들로 인해 코스의 모습과 설계의 취지도 달라졌다. 하지만 이렇게 성격이 진화하는 와중에도 오거스타내셔널은 여전히 분리되지 않은 하나의 거대한 실체로 인식되고 있다. <골프다이제스트>의 미국 100대 코스 랭킹에서 오거스타내셔널이 10위권 밖으로 밀려난 건 1966년 단 한 번뿐이었고, 1985년 이후로는 3위권을 굳건히 지키고 있다. 

2024년의 오거스타내셔널이 2004년의 오거스타내셔널과 비슷하다고 말하는 것은 1974년의 코스가 1934년의 코스와 비슷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데, 즉 별로 비슷한 데가 없다는 뜻이다. 시대별로 오거스타내셔널을 나눠보면 코스의 형태와 플레이의 특징이 저마다 독특하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궁금증이 생긴다. 오거스타내셔널이 이상적인 코스에 가장 가까운 건 언제였을까? 샷에 대한 요구, 홀 길이, 전략적 콘셉트의 실현 정도, 플레이 조건, 그리고 클럽과 볼의 기술 등이 어우러져 완벽한 조화를 이룬 때를 정확히 짚어내는 게 가능할까? 다시 말해 오거스타내셔널의 한 가지 버전을 골프 코스 명예의 전당에 헌액하려 한다면 어느 시기가 될까? 

12번홀(1948년). 수십 년 동안 파3 12번홀 등은 거칠고 단단하며, 자연의 힘에 속수무책이었다.
12번홀(1948년). 수십 년 동안 파3 12번홀 등은 거칠고 단단하며, 자연의 힘에 속수무책이었다.

1930~1940년대 
근본적 설계의 대격변 
6700~6800야드 
평균 우승 스코어: 281(-7) 
최저 우승 스코어: 279(랠프 굴달, 1939 / 클로드 하먼, 1948)

코스 설계의 순수주의자들은 앨리스터 매켄지와 보비 존스의 오리지널 1932년 디자인이 페어웨이를 넓게 조성해서 굴곡이 심하고 가파른 그린을 향해 위험을 감수하며 어프로치를 할 수 있게 하는 등 세인트앤드루스의 샷과 전략적 콘셉트를 내륙 코스에 잘 구현했다고 주장할 것이다. 최초의 디자인이 그렇게 매력적이었다면 초반의 오거스타내셔널이 까다로웠던 것은 1930년대의 잔디 상태 때문이라는 얘기가 된다. 

남부 코스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오거스타내셔널에는 버뮤다그래스를 식재했는데, 이 품종은 겨울이면 휴면 상태가 된다. 점토질 토양(오거스타의 토양)의 휴면 버뮤다 품종이 바싹 마르면 돌처럼 단단해진다. 그러다가 젖게 되면(남부는 겨울과 초봄에 비가 많이 내리기로 유명하다) 눅눅해져서 거의 플레이가 불가능해진다. 톰 왓슨은 바이런 넬슨이 그에게 페어웨이에서 클로버가 자라는 건 흔한 일이라고 말했던 걸 기억하고 있다. 그린과 페어웨이에 내한성의 다년생 라이를 덧뿌린 후에도(잔디의 쿠션감과 짙은 녹색을 확보하기 위해 오거스타에서 지금도 가을마다 실시하는 작업) 코스의 상태는 들쭉날쭉했으며, 관개시설은 물론 지하 배수 시설이 제한적이고 비료와 제초제의 수준도 떨어졌던 그 시대에는 자연의 변덕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대회 개최의 관점에서는 존스도, 클럽 회장이었던 클리퍼드 로버츠도 코스에 만족하지 못했다. 최초의 대대적인 교정은 1934년 대회 이후 전후반을 바꾸면서 거의 즉시 진행됐다(현재의 10번홀은 원래 1번홀이었다). 1938년과 1939년 마스터스 이전에도 페리 맥스웰이 7번·9번·10번·12번·14번홀 등을 크게 손봤다. 변화의 회전목마가 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1940년대는 격변의 시기였다. 지미 디마레과 크레이그 우드 그리고 바이런 넬슨이 우승한 후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 마스터스가 3년 동안 중단되자 코스도 휴지기에 들어가면서 잔디가 자라다 보니 거의 목초지로 변해버렸다. 전쟁이 끝난 후 클럽은 로버트 트렌트 존스에게 일련의 변경을 의뢰했다.  11번홀을 현대에 맞게 길이를 늘이고, 그린 옆에 커다란 패널티 구역을 조성한 것, 그리고 기존 방향에서 90도 틀어 넓은 연못을 가로지르도록 파3 16번홀을 새로 만든 것 등이 그 일환이었다. 

13번홀(1966년). 1960년대에는 대체로 페어웨이의 라이에 따라 파5 홀에서 투 온을 시도할 것인지가 결정됐다.
13번홀(1966년). 1960년대에는 대체로 페어웨이의 라이에 따라 파5 홀에서 투 온을 시도할 것인지가 결정됐다.

1950~1970년대 
공정한 테스트를 위한 변화 
6900~7040야드 
평균 우승 스코어: 281(-7) 
최저 우승 스코어: 271(잭 니클라우스, 1965 / 레이 플로이드, 1976)

 
1950년대 초가 되자 1951년부터 연못에 푸른색 염료를 풀어 넣은 것부터 시작해 오거스타내셔널은 본질적으로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코스의 형태로 자리 잡았다. 이때부터 1970년대 말까지의 시기는 개장했을 때에 비해 250야드 늘어난 6950야드의 길이를 꾸준히 유지하면서 US오픈을 자주 개최하는 오크몬트와 오클랜드힐스, 오크힐, 인버네스, 윙드풋과 같은 체급으로 올라섰던, 비교적 안정되고 평온한 시기였다. 개별적인 홀의 변동에도 불구하고 총 길이는 1990년대 말까지 거의 그대로 유지됐다.

이 시기에는 클럽과 볼의 기술이 발전하는 속도가 느렸기 때문에 오거스타내셔널의 홀 길이와 필요한 샷의 수준이 장비와 균형을 이뤘다. 드라이버 샷의 거리는 크게 변하지 않았고, 샘 스니드와 벤 호건이 구사한 샷과 잭 니클라우스와 톰 왓슨이 구사한 샷 사이에도 일관성이 존재했다. 5번·10번·11번·13번·15번·18번홀에서는 롱 아이언과 페어웨이 우드로 컨트롤이 뛰어난 어프로치 샷을 해야 했고, 쇼트 게임 샷은 스핀 컨트롤이 중요했다. 비록 요즘의 기준과 비교한다면 거의 거북이 수준이었지만, 당시만 해도 골프계에서 가장 빠르다고 여겨지던 그린에서 퍼트를 할 때는 세심한 감각을 발휘해야 했다(1977년 USGA 조사에 따르면 그 홀들의 스팀프미터 속도는 2.2m에 불과했는데, 지금은 3.9m 이상이다). 1950년부터 1979년까지의 평균 우승 스코어는 잭 니클라우스(1965)와 레이먼드 플로이드(1976)가 세운 최저타 기록인 271타를 포함해 280.6타(파 기준으로는 -7.4)였으며, 1934년부터 1949년까지의 평균 스코어(281.7)에서 1타 줄어든 것에 그쳤다. 

1930년대와 1940년대 이후 코스 상태는 개선됐지만, 많은 문제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선수들이 해마다 경쟁을 펼치는 잔디는 최고 수준이었지만, 지금의 기준에 비하면 원시적이라고 할 만했고, 페어웨이의 질도 여전히 자연의 영향을 받았다. 2~3월의 날씨가 따뜻하면 버뮤다가 일찍 자라면서 라이그래스의 성장을 촉진하지만, 기온이 평년 수준이거나 더 추운 해에는 버뮤다의 성장이 느리고 라이는 드문드문 자라거나 진흙 상태였다. “해마다 코스가 어떤 상태가 될지 알 수 없었다.” 니클라우스는 2016년 오거스타 연보에서 이렇게 말했다. “1965년에 나는 17언더파를 기록했다(당시 대회 최저타였다). 1966년에는 288타를 하고도 플레이오프에서 우승했다. 17타가 더 높은 스코어였는데, 그 두 해의 차이는 페어웨이였다.”

버뮤다 기반의 그린도 딱딱해서 긴 세컨드 샷을 멈춰 세우기 힘들었다. 선수들이 지금처럼 파5 홀을 장악하는 경우도 드물었다. “나는 늘 파5 홀에서 투 온을 할 수 있을 정도의 비거리를 갖고 있었지만, 그린에 볼을 세울 수 없었다.” 플로이드는 <골프다이제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2번이나 3번 아이언으로 어프로치를 했는데, 그린이 버뮤다그래스였기 때문에 너무 단단했다. 1976년에는 5번 우드로 샷을 했는데, 그건 높고 부드러운 샷을 구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다.” 

17번홀(1995년). 매켄지와 존스는 다양한 페어웨이를 구상했다. 선수들이 그린에 각도를 최대화할 수 있도록 말이다.
17번홀(1995년). 매켄지와 존스는 다양한 페어웨이를 구상했다. 선수들이 그린에 각도를 최대화할 수 있도록 말이다.

1980~1990년대 
무서울 정도로 뛰어난 그린 
7040~6985야드 
평균 우승 스코어: 279(-9) 
최저 우승 스코어: 270(타이거 우즈, 1997) 

각각의 코스 상태가 그 당시 기준으로는 이상적이었더라도 그린의 잔디를 벤트그래스로 변경했던 1980년대 이전의 오거스타내셔널을 ‘최고’라고 주장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 변화와 더불어 페어웨이에도 개량된 품종의 라이를 덧뿌리면서 오거스타내셔널은 현재의 코스 관리와 형태의 시기로 접어들었고, 벙커의 가장자리도 잘 다듬었다. 1980년대 초반에는 몇몇 그린이 거의 플레이가 불가능할 정도였는데, 벤트그래스의 더 빨라진 속도를 감당하기에는 경사가 너무 심했기 때문이다. 

“내가 우승을 했던 1981년에 마지막 라운드의 9번홀에서 샷이 그린 뒤쪽 가장자리 조금 위에 멈췄다. 퍼트를 하자마자 나는 장갑을 다시 끼면서 걷기 시작했는데, 퍼트를 하는 순간 볼이 그린 앞쪽을 넘어가리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왓슨의 기억이다. 벤트그래스가 자리를 잡자 볼에 엉겨붙는 정도도 늘어났고, 샷에 스핀이 들어가서 번번이 그린 밖으로 굴러가기에 이르렀다. “예전에는 18번홀에서 롱 아이언으로 어프로치를 하면 한두 번 튀어 올랐다가 멈추곤 했다.” 토미 에런은 1986년 마스터스 기간에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2번 아이언으로 샷을 하면 언덕을 따라 다시 내가 서 있는 곳으로 돌아올 수도 있다.” 

더 빨라진 벤트그래스 그린에 맞춰 선수들은 플레이를 조정해야 했고, 오거스타는 결국 4번·6번·8번·9번·14번·18번홀의 그린 굴곡을 완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볼 앞에서 숨이라도 크게 쉬었다간 볼이 경사를 따라 그린 밖으로 굴러나갈 지경이었다.” 헤일 어윈은 말했다. “이제는 최소한 숨이라도 쉴 수 있게 됐다.” 

오거스타내셔널이 복잡한 유지 관리의 마지막 조각을 맞춘 건 당시 골프 코스와 부지 관리를 맡았던 마시 벤슨이 표면 하부층의 공기 순환 시스템(요즘은 ‘서브에어’라고 부르는)을 개발한 1990년대였다. 뿌리에 공기를 공급하고 플레이 표면에서 물을 빨아들일 수 있는 이 시스템 덕분에 그린들 사이의 일관성이 크게 향상됐다. 전체 코스 가운데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데다 온도가 가장 낮은 곳이기도 한 파3 12번홀처럼 늘 문제를 일으켰던 그린을 바로잡는 데도 도움이 됐다. 이로써 오거스타내셔널은 플레이 표면을 관리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을 갖추게 됐다. 

10번홀(1990년대). 1995년부터 1990년 사이에 모든 것이 갖춰졌다. 넓은 페어웨이와 잘 관리된 컨디션, 장비의 발전에 비례해서 늘어난 길이까지.
10번홀(1990년대). 1995년부터 1990년 사이에 모든 것이 갖춰졌다. 넓은 페어웨이와 잘 관리된 컨디션, 장비의 발전에 비례해서 늘어난 길이까지.

2000~2010년대 
‘타이거 방어’ 프로젝트의 가동 
6985~7475야드 
평균 우승 스코어: 278(-11) 
최저 우승 스코어: 270(조던 스피스, 2015)

200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오거스타내셔널이 이전의 50년 동안 시도한 변화는 주로 잔디의 품종과 유지 관리 면에서 획기적인 방법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2002년부터는 보다 방어적인 전략을 꾀하게 되었다. 1980년에서 2001년 사이에 PGA투어의 드라이버 샷 비거리 평균이 22야드 이상 증가했다. 더 우려스러운 점은 1990년에서 2001년 사이의 평균 우승 스코어가 276.3타로 앞선 40년 동안의 평균(280.6)에 비해 4타나 낮아졌다는 것이었다. 

15번홀은 오거스타내셔널이 1950년대 이후 코스 설계 차원에서 단행했던 가장 중요한 코스의 변화들이 거리 증가에 따른 결정이었다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다. 2002년까지는 내리막을 따라 페널티 구역(워터해저드)을 넘어 15번홀 그린을 공략하는 세컨드 샷은 진 사라젠이 4번 우드 샷을 그대로 홀인시켜 더블 이글을 기록했던 1935년 이후 거의 변한 게 없었다. 선수들은 좋은 드라이버 샷으로 거의 예외 없이 220~230야드를 남겨놓았고, 롱 아이언이나 우드로 탁상 형태의 그린을 노리곤 했다. 1975년 마스터스의 마지막 라운드에서 니클라우스는 페널티 구역을 앞두고 약 235야드 거리에서 1번 아이언을 선택했고, 그의 볼은 3.6m 앞에 멈췄다. 그로부터 11년이 지난 1986년 니클라우스는 깃대까지 200야드를 남겨놓은 지점에서 4번 아이언 샷을 시도해(이때의 홀 길이는 1975년에 비해 20야드 짧았다) 역사적인 이글의 발판을 마련했다. 1998년 우승 당시 마크 오마라는 220야드 거리에서 3번 아이언 샷을 했고, 남은 네 홀에서 거둔 3개의 버디 가운데 첫 번째를 차지했다. 

2000년대 중반에 이르자 드라이버 샷의 비거리가 훨씬 늘어났다. 2006년에 홀을 530야드까지 늘인 후에도 그런 드라이버 샷 때문에 어프로치 샷의 거리는 200~210야드 정도였고, 대체로 5번이나 6번 아이언으로 처리했다. 2010년 말에는 2017년의 마지막 라운드 때 176야드를 8번 아이언으로 처리한 세르히오 가르시아처럼 장타자들의 경우 세컨드 샷으로 처리해야 하는 거리가 200야드 미만으로 줄어들었다. 

드라이버 샷의 거리에 대처하기 위해 오거스타내셔널은 1999년부터 2006년까지 총장을 520야드 늘였다. 그 후로도 100야드를 더 추가해 현재 공식 길이는 7545야드다. 더 중요한 것은 홀의 너비를 줄이는 방법으로 정확성의 비중을 높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세컨드 컷’이라는 이름의 러프를 추가하기 시작한 게 1999년이었다. “더 이상 선수들이 전력을 다해 스윙하도록 방치할 수 없다고 느꼈다.” 당시 마스터스 회장이던 후티 존슨은 말했다. 세컨드 컷은 스코어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보비 존스와 앨리스터 매켄지가 이런 걸 염두에 뒀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어니 엘스는 말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나는 크게 신경 쓰이지 않는다.” 

“나는 여전히 골프 코스는 전체적으로 동일하게 깎았을 때 더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럴 경우 빗나간 샷이 개울에 빠지고, 나무들 사이로 굴러가거나 솔잎 속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플로이드는 말했다. “그런데 러프는 볼이 그런 나쁜 라이로 들어가는 것을 막아준다. 그게 생긴 이후로는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8타나 9타가 나오지 않는다.” 

정확성을 추구하려는 노력은 2002년부터 2011년까지 더 강화됐다. 7번·11번·15번·17번·18번홀에서 페어웨이였던 부분에 웅장한 소나무 숲을 조성했다. 일례로 11번홀의 경우 드라이버 샷을 오른쪽으로 보낼 가능성은 완전히 배제됐고, 그에 따라 일부 선수들이 선호했던 어프로치 각도도 선택지에서 사라졌다. 이런 조치들이 코스의 신성함이라는 개념을 보호하는 데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는 몰라도 창립 당시 오거스타내셔널이 표방했던 매켄지-존스-세인트앤드루스의 취지, 즉 나무나 러프가 아닌 그린과 홀의 위치로 잘못된 플레이에 합당한 벌을 준다는 취지가 흔들린 것은 사실이다. “그냥 무작정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타이거 우즈는 2008년에 말했다. “마스터스라기보다 US오픈에서 플레이를 하는 것 같다.” 

2020년대
파워가 지배하는 시대 
7475~7545야드 
평균 우승 스코어: 275(-13) 
최저 우승 스코어: 268(더스틴 존슨, 2020) 

우리도 이제 막 이 시기에 진입했기 때문에 확정적 평가를 하기에는 조금 이를 것 같다. 오거스타내셔널은 홀 위치와 그린 스피드 등을 통해 개별 라운드 스코어를 어느 정도까지는 예측할 수 있지만, 그래도 계속해서 길이를 늘여왔다. 이제 장타자가 아니고서는 4라운드 동안 경쟁력을 발휘하기 힘들어졌다. 2023년 마스터스에서는 86명의 출전 선수 가운데 300야드 이상의 평균 비거리를 기록한 선수가 31명이었고(컷 탈락 선수 포함), 절반 이상이 295야드를 넘겼다. 지난 네 번의 마스터스에서 상위 8명의 드라이버 샷 비거리 평균은 각각 304.8, 308.5, 300.2 그리고 304.4야드였다. 또 최근 6명의 챔피언이 전부 두 자릿수의 언더파를 기록했는데, 이는 마스터스 역사상 최다 기록이다. 

‘가장 위대한’ 오거스타내셔널은? 
그렇다면 명예의 전당에 오를 오거스타내셔널은 어느 시기의 코스일까? 플레이 표면을 제어하는 클럽의 관리 능력은 이 코스가 이보다 더 좋았던 적이 없다는 주장을 뒷받침한다. 반면에 순수한 길이로 인해 출전 선수의 대략 절반은 그린 재킷을 아예 노릴 수 없게 됐다. 벤 크렌쇼와 세베 바예스테로스, 호세 마리아 올라사발 또는 게리 플레이어를 비롯한 왕년의 챔피언들처럼 기교와 감각 위주의 선수들은 지금의 코스에서 우승을 다툴 가능성이 없어졌다는 뜻이다. 여러 홀의 페어웨이를 좁힌 탓에 예전부터 좋은 스코어를 작성하는 데 결정적 요소였던 전략의 중요성이 배제됐다. 크렌쇼는 1986년 오거스타내셔널 전략을 TPC소그래스 같은 보다 가혹한 코스에 비교했다. “오거스타의 핵심은 전략, 전략, 또 전략이다.” 그는 말했다. “오거스타의 강점은 그린 주변 그리고 핀 위치에 맞게 티 샷을 보내는 능력에 있다.” 그런데 지금은 너무나 많은 홀에서 무작정 볼을 페어웨이에 보내는 것이 최대의 요건이 됐다. 크렌쇼가 TPC를 비난한 것과 똑같이 된 것이다.

2000년대와 2010년대, 그리고 지금도 아니라면 언제일까? 지미 디마렛과 샘 스니드, 벤 호건, 케리 미들코프와 재키 버크 2세 같은 챔피언들에게서 최고의 플레이를 이끌어냈던 1950년대 이전 시기도 고려해볼 만하다. 1960년부터 1966년까지는 이름이 아널드 파머나 잭 니클라우스, 게리 플레이어가 아닌 선수는 마스터스 우승을 하지 못했다. 이 시기의 오거스타내셔널은 다양한 클럽의 다채로운 샷을 요구하고 모험과 배짱을 발휘해야 했지만, 불규칙한 상태와 단단한 버뮤다 그린 때문에 1981년 대회 이전 코스는 최고로 꼽기 힘들다. 

1980년대는 환상적인 시기였다. 유럽 골프의 황금기라고 할 만큼 다양한 선수들이 오거스타와 더 매끄러워진 그린을 활보했다. 바예스테로스와 베른하르트 랑거, 샌디 라일, 닉 팔도가 대표적이었다. 1991년 이언 우즈넘이 등장해 왓슨과 크렌쇼, 크레이그 스태들러, 니클라우스 그리고 래리 마이즈 등과 실력을 겨뤘다. 하지만 잔디의 상태는 2000년대 이후에 도달한 유토피아적 수준을 일관되게 고수하지 못했다. 개선의 여지가 여전히 너무 많았다. 

그렇다면 남은 후보는 1990년대 중반 이후, 즉 클럽이 서브에어 시스템(1994)을 설치하기 시작하면서 유지 관리의 파라다이스를 확보했지만 오거스타의 취지와 어긋나면서 보기에도 어정쩡한 ‘세컨드 컷’이라는 러프를 조성하기 이전 시기다. 그래서 우리가 선택한 오거스타내셔널의 가장 이상적인 버전은 1995년부터 1998년까지의 코스다. 길이를 심각하게 늘이기 전에는 어떤 스타일의 골퍼라도 우승을 노려볼 수 있었다. 타이거 우즈가 기록적인 18언더파 우승을 차지했던 1997년을 전후해서도 마흔세 살의 크렌쇼(1995), 서른여덟 살의 팔도(1996), 그리고 마흔한 살의 오마라(1998)가 그린 재킷을 차지했다. 드라이버 샷의 비거리가 증가하고 있었지만, 코스는 스핀이 많이 들어가는 와운드 골프볼과 지금에 비해 작은 메탈 헤드 드라이버에 적합했고, 선수들은 파5 홀(심지어 몇몇 파4 홀)에서 롱 아이언과 우드로 어프로치를 해야 했다. 1996년 그렉 노먼을 따라잡은 닉 팔도가 13번홀에서 세컨드 샷을 할 때 5번 우드와 2번 우드를 놓고 한참 고민했던 것은 유명하다. 

일각에서는 1934년에 세상을 떠난 매켄지가 지금의 오거스타내셔널을 보면 알아보지 못할 거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어쩌면 변경된 홀, 가장자리를 선명하게 다듬은 벙커, 새로 조성한 소나무 숲, 페리 맥스웰의 그린과 티 없이 말끔한 잔디 때문에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만약 1998년으로 되돌아간다면 신체 조건이나 기술 면에서 폭넓은 스펙트럼을 아우르는 코스, 단순한 힘만이 아닌 용기와 슬기와 경륜을 모두 요구하는 코스를 높이 평가했을 것 같다. 최소한 그것이 자신과 존스가 설계했다고 믿은 오거스타내셔널이었으니까. 

글_데릭 덩컨(Derek Dunc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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