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강 칼럼_설계생활자] 공짜 점심은 없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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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강 칼럼_설계생활자] 공짜 점심은 없는 법
  • 서민교 기자
  • 승인 2022.10.05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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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스 설계가들이 ‘루트 플랜(Route Plan)’이라고 표현하는 이러한 도면을 작성하는 데는 많은 시간과 아이디어가 필요하고, 이런 과정은 공정하게 평가받아야 한다. 설계는 초기 구상과 접근이 가장 중요하다. 사진=이현강 제공
▲ 코스 설계가들이 ‘루트 플랜(Route Plan)’이라고 표현하는 이러한 도면을 작성하는 데는 많은 시간과 아이디어가 필요하고, 이런 과정은 공정하게 평가받아야 한다. 설계는 초기 구상과 접근이 가장 중요하다. 사진=이현강 제공

코스 설계를 하는 과정은 간단하지 않다. 코스 레이아웃의 초기 구상은 전체를 좌우한다. 여기서부터 코스설계가의 고뇌가 시작되는 것이다. 

국내 골프장 설계를 수행한 해외 설계가는 크게 일본과 미국 두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골프장인 효창원 코스를 시작으로 일제강점기부터 우리나라에 도입된 골프장은 해방 후 1980년대 초반까지 주로 일본 코스 설계가들이 새로 개장하는 골프장 대부분을 설계했다. 사회 전반적으로 일본 문화의 영향을 받거나 선망하는 시대적 분위기에 지리적으로 가까워 교류가 상대적으로 쉬운 이유 때문으로 보인다.

이 분위기는 2000년대 중반까지도 이어졌다. 국내 자생 코스 설계가들은 일본 설계가들과 교류하거나 그들의 골프 이론, 설계 자료를 번역·복사해 국내 실정에 맞는 설계 기준들을 만들었고 오늘날까지 상당수의 골프장 설계, 시공 관련 이론을 답습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투 그린이다. 서구 코스 설계가가 우리나라에 설계한 첫 골프 코스는 1985년 개장한 용평 퍼블릭 9홀 코스이며, 설계가는 미국인 로널드 프림(Ronald W. Fream)이었다. 비록 짧은 9홀 대중제 골프장이었지만 일본식 정원형 투그린 골프장이 골프장의 원형인 것처럼 여겨지던 당시 상황에서 서구 골프 코스의 도전성과 전략성을 중요시하면서도 한국의 산악지형을 거의 훼손하지 않고 코스를 배치한 코스 레이아웃의 새로움과 신선함에 골퍼들과 한국 코스 설계가들은 매우 놀랐다.

그러나 그것은 서막에 불과했다. 뒤이어 1989년 용평골프클럽이 개장했을 때 한국 골퍼들은 더욱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때까지 경험한 일본식 골프장과는 너무나 다른 도전적이고 전략적인 원 그린의 코스 레이아웃(용평 퍼블릭 코스는 투 그린, 일부만 원 그린)과 양잔디(켄터키블루그래스) 코스, 카트 운영 등 골프장의 조성·운영과 관련한 새로운 시스템은 이후 한국 골프계에 하나의 표준이 되다시피했다.

용평골프클럽 설계가는 미국인 로버트 트렌트 존스 주니어(Robert Trent Jones Jr.)였다. 현대 골프 코스를 대표하는 로버트 트렌트 존스의 아들이며 형제인 리스 존스(Rees Jones) 또한 유명 코스 설계가다. 용평 퍼블릭 코스를 설계한 로널드 프림이 로버트 트렌트 존스 사무실에서 근무했었고, 이후 독립해 설립한 골프플랜(Golfplan)의 데이비드 데일(David Dale)이 한국의 대표적 코스 중 하나인 클럽나인브릿지를 설계했으니 우리나라 서구 코스 설계의 흐름은 로버트 트렌트 존스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용평 퍼블릭 코스를 시작으로 서구 코스 설계가가 우리나라 골프 코스 설계 시장에 빠르게 진출하기 시작했다. 1988 서울올림픽을 거치고 한국 골프 시장이 호황을 맞기 시작하면서 한국에서 활동하는 해외 설계가의 대부분은 미국 설계가들이었다. 이러한 배경에는 미국 코스 설계가의 새로운 코스 개념, 설계 기술력뿐만 아니라 선진 문화를 대표하는 미국에 대한 선호와 선망도 깔렸던 것으로 보인다. 해외 골프 시장으로 눈을 돌리던 미국 코스 설계가 입장에서도 한국의 경제발전과 국제사회에서 인지도 상승 등을 고려하면 한국은 매우 매력적인 골프 시장이었을 것이다.

◇ 추앙받은 서구 코스 설계가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 힘입어 국내 초기 골프 코스 설계 시장은 외국 설계가들이 주류를 이루었고, 자생 국내 코스 설계가들은 경험, 기술력, 감각 면에서 상대적으로 외국 설계가들에게 위축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골프장 대부분은 회원제 골프장으로 개발됐다. 회원들은 대부분 권력가나 사회 저명인사, 사업가들이었다. 이들에게 고가의 골프 회원권을 분양하기 위해 골프장 사업가들은 검증되지 않은 국내 설계가보다 해외 설계가를 선정, 아니 초빙하는 분위기였다.

이런 상황들이 반복되다 보니 클라이언트는 오히려 ‘을’이 되었고, 서구 코스 설계가의 요구나 업무 기준이 골프장의 기준이 됐다. 해외 설계가는 점점 신봉받았고 국내 설계가는 점점 위축됐다. 하지만 해외 설계가는 업무 특성상 한국에 장기적으로 체류하거나 잦은 설계 협의를 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이 때문에 한국 코스 설계가들이 해외 코스 설계가와 사업 주간의 기술적 업무 협의 지원, 국내 관련 규정에 맞는 설계 코디네이션 등의 역할을 했다.

또 해외 설계가들은 정해진 업무 범위, 계약 이외 업무는 별도의 비용을 청구하고 자신의 설계 철학이 강하다 보니 사업주 생각대로 코스 레이아웃을 바꾸고 싶어도 코스 설계가가 동의하지 않아 사업주 마음대로 못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했다. 이 때문에 골프장 사업주들은 기본적 설계 도면만 해외 코스 설계가에게 받고 추후 간단한 설계 변경이나 현장에서 설계를 조정해야 하는 업무는 한국 코스 설계가에게 맡기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코스 설계가들은 자신의 설계 철학을 주장하기보다 사업주의 의견을 충실히 반영하고 이행하는 단순 설계 기술자로 전락했다. 이러한 태생적, 시대적 한계에도 현재 한국 코스 설계가들이 인내하고 실력을 쌓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현재는 국내 코스 설계 건수가 많이 줄기도 했지만, 굳이 해외 코스 설계가에게 설계를 의뢰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해외 코스 설계가라는 프리미엄 효과와 신선함이 떨어진 것도 있지만 한국 코스 설계가들의 안목과 실력이 높아졌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 한국 산지형 코스 설계의 어려움

그러나 당당하게 한국 골프 시장에 초빙받은 서구 코스 설계가들을 괴롭히는 것이 있었다. 바로 한국의 변화무쌍한 산악지형과 까다로운 산지, 식생, 환경 관련 법규였다. 외국 코스 설계가들이 한국에 처음 와서 놀라는 것 중 하나는 설계 대상지가 대부분 산악지형이라는 것과 골프장 총사업비다. 산악지형을 접하면 왜 이런 산을 보전하지 않고 골프장으로 개발하는지에 놀라고, 골프장 개발로 발생하는 토공 물량이 어마어마한 것에 다시 한번 놀라고, 골프장 공사비와 총사업비를 듣고 나면 왜 그 정도 비용을 들이면서까지 골프장을 개발하는지에 또다시 놀란다.

필자는 1년에 150건 이상의 골프장 입지를 검토하는데 대부분 산악지형이다. 이처럼 한국 골프장 입지 특성 중 하나는 대부분 산지에 위치한다. 해외 코스 설계가들은 산악지형 코스 설계를 한 경험이 많지 않고, 있더라도 한국의 산악지처럼 변화무쌍한 지형이 아니어서 코스 주변의 비탈면 처리와 계단식 홀 배치를 매우 낯설어한다.

그나마 일본 코스 설계가들은 산악지형에 어느 정도 익숙했지만, 미국을 비롯한 서구 코스 설계가들은 한국의 산악지형과 같은 경사 지역에 코스 설계를 한 경험이 많지 않았다. 굳이 한국 산악지형과 같은 지역에 골프장을 만들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세이지우드여수경도컨트리클럽을 영국의 디엠케이 골프디자인(DMK Golf Design)의 데이비드 맥레이 키드(David Mclay Kidd)와 공동 설계할 때 홀 주변 비탈면의 높이, 경사, 소단 등을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데 꽤 힘들었다. 설명을 들은 데이비드는 왜 이런 지형에 18홀이 아닌 무리하게 27홀을 배치하는지 되물었던 기억이 있다. 골프장 사업비와 사업성에 대한 긴 설명을 해주면 그때야 겨우 산악지형 활용과 마감에 대해 이해는 하지만 자연지형을 자연스럽게 활용하는 코스 레이아웃은 힘들다는 것을 깨닫고 기운 빠져 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특히 비탈면이 토공적으로 안정적이더라도 5m 높이마다 소단을 둬야 하는 규정을 가장 이해하지 못했다.  

◇ ‘간단한’ 스케치만 해달라는 무리한 부탁

사정이 이렇다 보니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해외 코스 설계가들은 사업주가 다루기 어렵고, 계약 범위 이외의 사업주 부탁은 잘 들어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국내 산악지형의 인허가 조건에 맞는 설계도를 받기 어려웠다. 하지만 국내 코스 설계가들은 사업주가 원하는 대로 코스 설계를 해줄 뿐만 아니라 설계 수주라는 영업활동을 핑계 삼아 무료로 설계안을 받아봐도 된다는 분위기가 많았다.

이런 악습이 일부 지금까지 이어져서 아직도 골프장 사업가들이 공짜로 ‘간단한’ 코스 레이아웃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해외 코스 설계가에게 무료 서비스 도면을 받아보기는 힘든 상황이다 보니 만만한 국내 설계가들에게 설계 수주를 미끼로 무료 코스 레이아웃을 요구하는 것이다.

코스 설계는 매우 넓은 토지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골프 사업주들이 ‘간단하다’고 표현하는 초기 구상이라 하더라도 대상지 전체에 대한 지형 활용과 변화를 복합적으로 고려해 검토해야 한다. 게다가 법규적인 제약과 토공량까지 염두에 둬야 한다. 설계는 벽돌을 하나씩 쌓아가는 과정처럼 단계별 집중도가 균일하게 투입되는 것이 아니라, 초기 아이디어와 구상이 전체를 좌우한다고 할 정도로 초기 구상이 중요하다.

전체 틀을 짜는 순간 디테일 또한 자연스럽게 결정되는 것이다. 간단한 것이 결코 간단하지 않고, 전체를 다루어야 한다. 코스 설계가들이 쏟아붇는 아이디어와 시간의 결과물을 수주 영업이라는 잣대로 무료로 받아보겠다는 생각은 공정과 상식을 벗어난다. 코스 설계의 아주 중요한 요소가 ‘공정성’이다.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는 법이다.

* 코스 설계가 이현강은 오렌지엔지니어링에서 설계를 총괄하며 골프다이제스트 코스 자문 위원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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