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강 칼럼] ‘한국 최초 골프장’ 효창원 코스의 재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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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강 칼럼] ‘한국 최초 골프장’ 효창원 코스의 재구성
  • 서민교 기자
  • 승인 2022.03.05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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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 골프장의 모습은 어땠을까. 이 물음에 진지한 고민을 해본 적이 있는가. 사라져 흔적조차 희미해진 100년의 역사를 거슬러 효창원 코스를 분석하고 재해석하는 작업은 그 자체로 역사적 가치가 있다.  

‘최초’라는 단어는 신비감과 중압감을 동시에 주는 단어다. 1921년 6월 1일 개장한 효창원 코스는 한국 최초의 골프장이다. 그로부터 100년이 흐른 지금 우리나라 골프 산업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효창원 코스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나 자료가 부족하고 골프계의 무관심 속에서 효창원 코스는 그저 한국 골프사를 이야기할 때 한 번쯤 등장하는 이름으로만 남아 있다. 한국 골프 100년의 시점에서 필자는 코스 설계를 업으로 삼고 있다. 효창원 코스에 대한 관련 자료가 거의 없는 상황이지만, 당시 자료와 현재의 효창공원 관련 자료를 분석해 우리나라 최초 골프장의 조성 당시 시대적 배경, 코스 특징, 코스 레이아웃 등을 이 시대 코스 설계가 입장에서 되짚어보고자 한다.

◇ 제국주의 산물, 식민지 골프장

유럽에서 시작된 제국주의의 광기는 18세기 산업혁명 이후 아시아까지 전 세계를 뒤덮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영국은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며 동아시아까지 제국주의 영향력을 뻗쳤다.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 또한 빠르게 근대화에 돌입했고, 서구의 제국주의 사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중국 요동반도에서의 제국주의 간 패권 다툼에서 러시아의 남하 정책을 견제하기 위해 영국과 일본은 영일동맹을 맺어 굳건한 동맹 관계가 되었으며 이후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기까지 이른다. 영일동맹을 계기로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에도 영국과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여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일본 제국주의는 영국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 일본 고베에 거주하던 영국인 댄트(H.E. Dannt)가 1915년 일본골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고 효창원 코스 설계까지 하게 된 데는 이런 배경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 왜 효창원에 만들었나

제국주의식 식민지 약탈은 문명화와 근대화를 명분으로 내세웠다. 그 대표적인 시설이 철도였다. 그 당시 철도는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 수탈과 지배를 위한 수단이었다. 식민지 도시는 철도를 중심으로 발전하게 했다. 서울 청량리, 군자리 코스 외에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대구, 평양, 원산, 부산 골프장 등 대부분이 철도가 발달한 도시에 만들어진 것은 결코 우연이라고 할 수 없다.

1904년 러일전쟁 때 경성을 강점한 일본군은 1906년 둔지미(구 용산 미군 기지)에 조선 주둔 일본군 사령부와 철도 거점을 조성했고, 효창원 남쪽 영역이던 도원동에 유곽과 철도 관사를 조성해 효창원 성역을 잠식했다. 효창원은 조선 후기 1786년 정조의 아들 문효세자의 묘역인 효창묘로 조성 후 효창원으로 승격했다.

1913년 조선신문사에서 발간한 사진집 <선남발전사>와 1920년대 신문기사의 사진에서 보이는 효창원은 소나무 숲이 우거진 경치가 아름답고 능선을 따라 잔디가 펼쳐진 곳으로 신문에서는 송림이 경성의 명물로 소개된다. ‘1915 측량도’를 보면 효창원은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골프장 터를 물색하던 조선철도국은 환구단 옆에 있던 조선철도호텔과 경성역에서 가깝고 자연환경이 뛰어날 뿐 아니라 토지 확보가 수월한 국유지인 조선 왕실의 묘원 효창원을 낙점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왕실을 모욕하고 식민지 백성을 무시할 의도까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존중하는 결정이 아닌 것은 분명해 보인다.

조선 후기 동여도. 효창묘로 표시(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조선 후기 동여도. 효창묘로 표시(서울역사박물관 소장).

◇ 국유지 임대형 공공 개발 사업

여러 연구를 통해 알려진 바와 같이 효창원 코스는 남만주철도주식회사의 한반도 내 철도를 위탁 경영하던 조선총독부의 조선철도국 직영 조선철도호텔의 부속 호텔로서 관광객 유치뿐 아니라 투숙객 서비스 제공을 위한 목적으로 개발되었다. 국유지인 효창원 인근 약 5만8000평을 임대해 골프장을 건설하고 조선철도국이 관리하는 구조였다. 현재 부동산 개발 방식에 비춰보면 ‘국유지 임대형 공공 개발 사업’ 형식이라 할 수 있다.

1918년 5월 골프장 설립 허가 후 스페인 독감과 3·1 운동 이후 긴장된 사회 분위기 속에서, 공사는 1919년 9월에 착공하고 공사비는 6000엔이었다(강인구, 2020). 1919년 5월 13일 설계자 댄트의 환영연이 열릴 자리에서 설계안을 발표했다. 철도국 공무과에서 공사를 감독했고, 1921년 6월 1일 준공했다(손환, <한국 골프의 탄생>, 19쪽 재인용). 당시 소나무 수림 상태와 토목 기술을 고려하면 홀이 들어가는 지역만 소나무를 벌목하여 홀을 조성했지만 상당히 난공사였던 것으로 알려진다.

◇ 지형도로 본 위치

구릉지에 사업 부지를 설정할 경우 일반적으로 능선을 중심으로 부지 경계를 삼는 점과 대규모 토목 공사 후 골프 코스를 조성하는 것이 불가능한 당시 토목 기술을 생각하면 효창원 코스 북서쪽 경계는 현재 효창공원 북서쪽 능선부 외곽 도로 주변으로 추정된다. 클럽하우스는 당시 교통 여건상 완만하고 접근이 쉬운 남쪽에 자리했으며 현재의 효창운동장 남서쪽 공원 경계 밖으로 예상된다.

효창원 코스는 도면이 아닌 그림엽서 형태(손환, <한국 골프의 탄생>)로 전해진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림엽서의 효창원 코스 축척과 스코어카드 제원 축척을 같게 한 후 ‘1921년 조선지형도’와 비교했다. 그림엽서의 효창원 코스 도면의 북쪽과 남서쪽 봉우리 위치를 ‘1921 조선지형도’의 문효세자묘 북측 봉우리를 기준으로 축척을 가늠하여 맞췄다.

이 외에도 ‘1927 경성부관내도’, ‘1934 경성부관내도’, 현재의 국토지리정보원 발행 1/1000 수치지형도, 위성사진 등에 반복적으로 중첩하고 주변 도시 변화 과정을 참고하여 조성 당시 효창원 코스 경계와 코스 레이아웃을 예상해 보았다. ‘1921 조선지형도’는 등고선이 표시되어 북쪽, 남서쪽 봉우리와 골프 코스 그림엽서의 봉우리를 일치시켜 대략의 코스 배치를 예상할 수 있었다.

(가장 왼쪽 위 사진부터 시계 방향) ‘1927 경성부관내도’에 효창원 코스 중첩. 붉은색은 현재 효창공원 경계(서울역사박물관, 서울지도, 2006). / 효창원 코스 그림엽서(손환, <한국 골프의 탄생>) / ‘1921 조선지형도’에 효창원 코스 중첩. 붉은색은 현재 효창공원 경계(용산구, 효창공원 역사적 가치 및 활용을 위한 학술연구보고서) / ‘1937 경성부지도’에 효창원 코스 중첩. 붉은색은 현재 효창공원 경계(Heibonsha 스캔 자료, 2003) / ‘1934 경성부관내도’에 효창원 코스 중첩. 붉은색은 현재 효창공원 경계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지도, 2006). / 현재 효창공원 경계에 효창원 코스 중첩 (카카오맵 위성 사진)

그러나 골프 코스 이후의 다른 지도는 등고선이 없어 경인선철도, 주변 가로를 기준점 삼아 그림엽서상의 골프 코스를 중첩한 결과 서쪽 능선부와 접하는 부분에서 지도별 약간의 오차가 발생했다. 1921년 6월 1일 효창원 코스 개장 후 3년 만인 1924년 6월 효창원의 일부는 효창공원(8만1640평)으로 바뀌었고, 1924년 12월 3일 골프장은 폐쇄됐다. 도시가 팽창하던 경성에서 당시 가장 큰 녹지였던 효창원 일대를 유원지, 공원, 주택지로 개발하자는 요구 때문이었다.

효창공원 지정 당시 면적이 코스 면적보다 넓은 것으로 판단해 공원 내 코스가 포함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현재 효창공원 면적이 17만1277㎡(약 5만1900평)인 것을 생각하면, 공원 면적이 축소되는 과정에서 효창원 코스 경계가 효창공원 경계와 어떻게 달라졌는지 골프장 조성 전후의 ‘1915년 측량도’, ‘1921 조선지형도’, ‘1920년 경성부공원계획지도’, ‘1934년 조선지형도’ 등 당시 지형 자료와 현재 지형도를 더욱 세밀하게 비교 분석하는 연구가 필요하다.

◇ 파크랜드 코스 스타일

초기 골프 코스는 한 라운드의 홀 수도 규정되지 않았고, 코스는 기존 지형 및 경관을 수정하거나 변경하지 않고 그린과 티에 적당한 위치에 맞게 단순히 ‘배치(Laid out)’된 것이었다. 1857년 영국왕립골프협회(R&A)가 골프 경기의 한 라운드를 18홀로 규정한 이후 1900년 초까지 전 세계적으로 첫 번째 골프 붐이 일었다. 이때부터 18홀로 ‘라우팅(Routing, 연속된 홀의 흐름)’된 코스가 유럽 본토와 러시아, 호주, 북미 지역에 조성됐다.

특히 1910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 반발 직전인 1930년대 후반까지를 골프의 황금기로 부른다. 이 시기에 더내셔널골프링크스, 페블비치, 파인밸리, 사이프러스포인트, 오거스타내셔널 등 불후의 골프 코스가 조성됐다. 산업혁명 이후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부르주아 계급의 부 축적 등을 바탕으로 세계적 골프 붐이 일고 골프의 황금기 속에서 식민지 경성에도 드디어 1921년 한국 최초의 골프장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골프의 본고장 스코틀랜드의 샌드 듄(Sand Dune) 지형에서는 자연 지형에 단순히 ‘배치된’ 코스 조성이 가능했으나 효창원은 소나무 숲을 벌목하고 구릉지를 다듬어 코스를 배치해야 했다. 이 때문에 단순히 ‘배치’된 코스가 아니라 ‘라우팅’된 코스 레이아웃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고 본다.

한국 최초의 골프 코스는 소나무 숲속의 ‘회원제 파크랜드 코스’였다고 표현할 수 있다. 요즘 표현하는 코스 스타일로 보면 파인밸리나 파인힐스 정도가 아닐까. 당시는 토목 장비나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수레나 인력을 이용한 토목 공사만 가능해 지금 기준의 코스 컨디션을 확보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설계자 댄트의 회고록에도 그 어려움이 묘사되어 있다. “송림이 울창하고 잡초가 무성한 효창원에 손을 댄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9홀을 만들기도 쉽지 않았는데 묘까지 산재한 곳에 코스를 만드는 것은 어렵다. 묘를 옮기는 것을 조선인은 달가워하지 않는다(H.E. Dannt, 1923, Golf in the Hermit Kingdom).”

코스 레이아웃 재구성 당시 스코틀랜드는 전 세계 골프 전도사나 다름없었다. 근대 골프 코스 설계의 아버지로 불리는 스코틀랜드 출신 앨리스터 매켄지(Alister MacKenzie)가 미국과 호주에서 골프 황금기를 이끌었고, 미국 코스 설계의 대부로 불리며 동시대에 활동한 도널드 로스(Donald Ross) 또한 스코틀랜드 출신이었다.

당시 세계적 코스 설계 트렌드는 스코틀랜드 클래식 코스였다. 설계가인 영국인 댄트도 당시의 스코틀랜드 클래식 코스 설계 요소를 효창원 코스 레이아웃에 많이 반영했을 것이다. 홀마다 특정 명칭을 부여하는 것 또한 그 예이다. 한국 최초의 골프 코스 레이아웃이 남아 있다는 것은 고무적이지만, 도면이 아닌 그림엽서 속 그림으로 남은 것이 안타깝다.

그림 속 지형 등고선은 당시 지형 측량도와 비교해보면 실제 지형을 표현하기보다는 그림의 장식적 성격이 강해 보인다. 전체적으로 일본 민화(우키요에)풍으로 표현했고, 실제 홀 형태를 그린 것이 아니라 원이나 사각 도형으로 홀을 도식화하여 그렸다. 등고선이 정확하지 않고 요즘처럼 주요 지점별 계획 레벨을 표시하지 않아 전반적인 홀 경사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코스 레이아웃 분석은 효창원의 전반적인 지형이 크게 변형되지 않은 상태에서 각 홀이 배치되었을 것으로 가정하고 그림엽서의 홀 모양이 실제와 가장 유사하게 그려졌을 것이라는 전제하에 레이아웃을 분석해보았다. 레이아웃의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다.

- 9홀, 2322야드(파는 확인 안 됨).

- 원 그린, 원 티(One Green, One Tee, 우리나라 최초 그린은 원 그린이었음).

- 모든 홀의 플레이 방향을 다르게 하여 조망을 달리함.

- 코스 모양과 주위의 경치에 따라 홀 이름을 지음(매일신보, 1919년 5월 14일).

- 3번홀까지는 짧은 홀, 마지막 홀은 가장 긴 홀로 구성.

- 직선과 도그레그 홀의 적절한 조화.

- 홀 업/다운(Up/Down)의 적절한 균형. 6개 홀 티 샷이 하향.

- 일출, 일몰 시 태양 눈부심 영향 홀은 없음.

- 페어웨이 I.P. 기준 거리는 일정하지 않음.

- 플레이 너비는 40m 내외로 추정. OB가 많았을 듯.

효창원 코스 레이아웃은 현재 기준으로 보더라도 상당히 이상적인 설계 기준을 준수한 것으로 보이며 홀별 이름을 보면 서정적인 느낌의 라우팅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골프장 근처를 산책하는 시민이나 행인과 골퍼 사이에 타구 사고에 대한 마찰이 빈번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주변 민가나 도로에 가깝게 홀이 배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현재 자료로는 주변 시설을 확인하기가 어렵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골프 코스의 타구 안전성 확보는 설계의 가장 우선적인 고려 사항인 것 같다.

◇ 역사 없는 미래는 없다

골프계에서 한국 최초 골프 코스가 어디인지에 대한 이견은 있지만, 기록된 사실만 역사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현재로서는 효창원 코스가 우리나라 최초의 골프 코스임이 틀림없다.

효창원 코스가 개장한 1921년은 3·1 운동 이후 일본의 식민지 통치가 무단 통치에서 문화 통치로 전환되던 시기였다. 클럽의 일본식 표현인 구락부(俱樂部)에서 일본인, 친일파, 외교사절이 어울리는 사치스러운 풍류로 도입됐다. 전 세계적으로 불어닥친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격랑 속에서 탄생한 우리나라 최초의 골프 코스가 비록 일제강점기 문화 통치의 산물이라는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지만, 한국 골프 100년이 이곳에서 시작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뿌리가 튼튼해야 풍성한 가지와 열매를 맺을 수 있고 역사 없는 미래는 없다. 효창원 코스의 아픈 역사와 실제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찾고 연구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골프 발전과 사랑의 시작이다. 다소 거칠고 부정확한 추측이 많지만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이 글을 쓰는 이유는 한국에서 코스 설계가로 살면서 느끼는 원죄를 찾아 그 내막을 조금이나마 밝히자는 작은 책임감 때문이다. 태생적 아픈 역사를 딛고 골프가 더 많은 분께 사랑받기를 바란다. 

* 코스 설계가 이현강은 오렌지엔지니어링 전무이자 골프다이제스트 코스 자문위원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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