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길용, 난 멈추지 않는다 [People: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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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길용, 난 멈추지 않는다 [People:1607]
  • 김기찬
  • 승인 2016.07.15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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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길용, 난 멈추지 않는다 [People:1607]

사진_이승훈

박길용, 난 멈추지 않는다

KPGA 챌린지투어(2부투어)에서 우승한 프로 골퍼 박길용은 밝은 미소를 가졌다. 그 뒤에 감춰진 힘든 시기가 연상되지 않을 만큼 기분 좋은 미소를 가진 그는 올해 최고의 한 해를 보내고 있다. 1부투어에서 우승한 것도 아닌데 무슨 최고의 해냐고? 그에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글_고형승

기억은 참 이상한 힘을 가지고 있다. 좋은 기억보다 나쁜 기억이나 아픈 기억이 더 오래가는 경향이 있다. 아마도 그 때문에 인간에게 ‘불안’이나 ‘공포’라는 감정이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프로 골퍼의 대부분은 과거 슬럼프를 겪었다고 말한다. 또 그중 일부는 입스를 경험했다고 털어놓는다. 하지만 프로 골퍼 박길용은 말한다. “진짜 입스를 경험한 선수는 절대로 그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아요.” 박길용은 중학교 2학년 때(1999년)부터 골프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전까지 그의 관심사는 축구였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축구부 코치의 눈을 피해 다니기 일쑤였다. 공으로 하는 운동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좋아했지만 맞으면서까지 배우고 싶지는 않았다. 사실 골프가 좋아서 시작하기는 했지만 그에게 골프가 큰 비중을 차지했던 건 아니었다. 그냥 공부를 많이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더 좋았다. 그의 아버지는 그와 동생을 앉혀놓고 같은 질문을 던졌다. 공부를 할 것인지, 골프를 할 것인지. 그는 골프를, 동생은 공부를 택했다. 그런데 지금은 동생도 호주에서 프로 골퍼가 됐다. 동생 이름은 박성용이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호주로 혈혈단신 건너간 박길용은 아버지의 고향 선배 집에서 홈스테이를 했다. 아버지 선배에게는 딸이 있었는데 그녀가 바로 프로 골퍼 오세라다. 그녀는 당시 주 대표를 하고 있을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다. 고등학교 시절 박길용의 골프 실력도 눈에 띄게 늘었다. 당시 친구 중에는 세계 아마추어 골프 랭킹 1위인 이원준이 있었다. 그와는 아직도 단짝으로 지내고 있다. “시드니에 머물 때 주 대표를 할 수 없었어요. 일정 기간 거주해야 그 자격을 갖출 수 있다는 걸 나중에 알았죠. 시드니에서 퀸즐랜드 골드코스트로 이사한 후에 시드니골프협회에서 연락이 왔어요. 주 대표 대상자가 됐다는 거죠. 저는 퀸즐랜드에서도 주 대표는 할 수 있을 걸로 생각했어요. 하지만 역시 거주 기간이 발목을 잡았습니다. 매주 발표되는 랭킹을 보면 저보다 순위가 높지 않은 친구들도 주 대표로 활동하고 있었어요. 결국 포기하고 한국에서 KPGA 준회원 테스트를 보려고 마음먹었는데 협회에서 주 대표를 위한 트레이닝을 받아보지 않겠냐며 연락이 왔어요. 그때가 2005년이었습니다.” 박길용은 주 상비군에 합류해 훈련을 받았지만 대표에는 발탁되지 못했다. 대신 한국으로 눈을 돌렸고 2006년에 준회원 테스트를 통과했다. 하지만 정회원 테스트는 번번이 떨어지고 말았다. 새로운 전환점이 필요하던 시기에 그는 미국에서 미니투어에 출전하기로 결심했다. 그때가 2008년이었다. 친한 선배와 함께 8주간 매주 대회에 참가하는 계획을 세우고 무작정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니투어는 참가 선수들이 500~1100달러 사이의 참가비를 내고 그중 일부를 상금으로 받는 방식이다. “미국은 처음이었죠. 매주 실력 있는 선수들과 경기를 치를 수 있다는 게 좋았어요. 그때 우승도 한 번 하고 3위에도 한 번 올랐어요. 그 경험이 제가 골프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됐습니다. 미국에 가기 전에도 KPGA 챌린지투어에 출전했지만 하루에 3~4언더파를 친다는 게 너무 어려웠어요. 예선을 통과하려면 무조건 언더파를 기록해야 하는데 그런 부담 때문에 공격적으로 치곤 했죠. 하지만 미국에 다녀와서는 마음이 편해졌어요. 우승까진 아니지만 꾸준히 10위권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2009년에 드디어 정회원 테스트를 통과했어요.”

첫 투어 생활 그리고 갑자기 찾아온 불청객 KPGA 정회원이 된 박길용은 2010년에 시드 순위전을 통과해 이듬해인 2011년에 코리안투어에 출전했다. “2006년부터 기다려온 순간이었죠. 정말 기뻤고 감격스러웠습니다. 호주에서 전지훈련을 잘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어요. 동생이 중국투어 퀄리파잉(Q)스쿨에 도전해보고 싶다는 거예요. 그래서 저도 중국과 한국투어를 병행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동생과 함께 갔어요. 연습 라운드도 잘했고 컨디션이 제법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큐스쿨 둘째 날 난생처음 예기치 않은 일이 발생해요.” 티잉 그라운드에 올라선 박길용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볼이 코스 밖으로 날아가는 영상이 리플레이되듯 계속 그려지고 있었다. 그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건 불안하거나 위축될 만한 상황이 전혀 아니었다는 점이다. 첫 투어 데뷔를 앞두고 있었고 호주에서의 훈련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상황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던 상황이라 그는 그 현실이 당황스러웠다. 생각을 그만하려고 코스를 쳐다보지 않아도 전혀 소용이 없었다. 전반 9홀에만 50타를 넘게 친 것이다. 결국 그는 바로 백을 내려 한국으로 향했다.

“더는 쳐봐야 좋을 것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골프를 시작한 이후에 처음으로 기권했습니다. 도대체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긴 거지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한국에서의 첫 경기가 먼싱웨어매치플레이챔피언십 예선전이었습니다. 여전히 백스윙을 하면 팔이 내려오지 않았어요.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불안감은 더 심해졌습니다. 결국 제주도에서 열린 개막전도 포기하고 호주로 갔어요. 한 달간 훈련을 하고 다시 왔지만 진전이 없었습니다. 군산CC오픈이 저에게는 시즌 첫 경기였는데 전날 꿈에 파5홀 티잉 그라운드에서 58도 웨지를 들고 치고 있는 게 아니겠어요. 2011년은 그야말로 최고의 기회를 잡았는데 최악의 한 해가 되고 말았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무리하게 연습하다가 척추 분리증 진단까지 받게 되자 박길용은 좌절의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시드를 잃어버린 그는 2014년에는 모든 걸 잊기 위해 돈을 버는 데 집중했다. 나중에 투어에 돌아갈 때 경제적으로 압박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1년을 보내고 나니 그를 짓누르던 불안감은 많이 해소됐다. 2015년에는 결혼도 했다. “아내에게 미안한 일이었지만 대회를 계속 나가보고 싶다고 했어요. 골프 인생의 마무리를 그렇게 좋지 않게 하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그래서 다시 일을 그만두고 운동에만 전념했습니다. 그전보다 좋아지기는 했지만 성적을 내지 못하니 아내도 내색은 안 했지만 힘들었을 거예요. 아내에게는 매번 좋아지고 있다고 말만 했지 결과로 보여주는 게 없었으니까요.”

그래, 다시 시작해보는 거야 박길용은 올해도 일과 훈련을 병행하겠다고 아내를 설득했다. 드디어 그는 5월에 플라자컨트리클럽에서 열린 챌린지투어 3회대회에서 우승하며 그 믿음에 보답했다. “올해 우승까지는 바라지도 않았어요. 일도 함께 하고 있기 때문에 연습량이 많이 부족해요. 하지만 좋은 기회가 다시 찾아왔고 그걸 놓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습니다. 대회 마지막 날도 볼이 그렇게 잘 맞았던 건 아니었어요. 스윙 템포가 점점 빨라지는 걸 느껴서 6번홀부터는 드라이버를 한 번도 잡지 않고 3번 아이언으로만 티 샷을 했습니다. 다른 선수들은 드라이버로 공략하다가 스코어를 잃었지만 저는 스코어를 지킬 수 있었죠.” 그는 올해 1월 딸 (박)수빈이를 얻었다. 그리고 5월에는 그토록 기다리던 첫 우승을 차지했다. 남은 대회에서 상위권만 어느 정도 유지할 수 있다면 6년 만에 다시 한 번 정규 투어 시드권을 획득하게 된다. 2011년이 그에게 있어 최악의 해였다면 2016년은 그에게 최고의 해가 되고 있다. “두 번째로 기회를 잡게 되는 겁니다. 설레기도 하고 기대도 많이 됩니다. 만약 다시 1부투어로 올라가게 된다면 지난번과 같은 실수는 또 하고 싶지 않아요. 그때도 오래 기다려왔던 기회라는 생각에 놓치지 않고 싶다는 욕심이 컸어요. 그래서 그 욕심이 화가 됐던 것 같아요. 이제는 잘 준비해서 욕심이 아니라 실력을 끌어올려서 좋은 성적을 냈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박길용은 퀸즐랜드주에서 함께 주니어 선수 생활을 했던 제이슨 데이와의 일화를 들려줬다. “제이슨은 저보다 두 살 어려요. 앳된 모습이 정말 귀여웠습니다. 그를 아직도 기억하는 이유는 다른 선수들이 모두 드라이빙레인지에서 연습하고 있을 때 제이슨만은 혼자 오랜 시간을 쇼트 게임에 할애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한번은 그가 제 친구의 캐디를 한 적이 있었는데 몇 홀을 함께 돌면서 저에게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골프를 잘하고 싶어? 그럼 쇼트 게임만 연습해’라고 말이죠. 그는 나이는 어리지만 저에게 많은 영감을 주는 친구입니다.”

1 골프다이제스트 : 혹시 징크스가 있나?

박길용 : 나는 평소 징크스를 만들지 않는 편이다. 주니어 시절에는 대회 전에 손톱을 깎으면 안 된다고 하기에 대회 당일 깎아보기도 했다. 골프볼 숫자가 4번이 부정적이라고 하지만 나는 4번으로 플레이를 한다. 이번에 우승할 때도 6번홀이 끝나고 약간 시간이 있어서 손톱을 깎았다. 그리고 볼도 4번을 썼다.
2 골프다이제스트 : 혹시 징크스를 만들지 않는 성격이라면 중국 큐스쿨에 다시 도전해볼 생각은?

박길용 : 하하. 정말 그건 생각하고 있다. 2017년 시즌을 앞두고 다시 한 번 도전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중국투어를 통해 PGA투어에 진출하는 선수들도 있으니까. 중국투어 큐스쿨에 대한 두려움은 없다. 만약 그런 게 두려웠다면 다시 골프 클럽을 잡지 못했을 것이다.
3 골프다이제스트 : 부모님과 아내에게 하고 싶은 말은?

박길용 : 부모님의 뒷바라지가 없었다면 지금의 내가 있을까 싶다. 아내(윤지은)는 골프를 전혀 모른다. 나 하나만 믿고 내 말을 무조건 믿고 따라줘서 정말 고맙다. 이번에 우승하고 전화 통화를 했는데 우는 것 같았다. 부모님처럼 아내도 마음고생이 심했을 것이다. 가장이라는 사람이 돈은 벌어오지 않고 운동한다고 돈만 쓰고 있었으니 얼마나 힘들었겠나. 그렇게 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기다려준 아내가 고맙다.
4 골프다이제스트 : 만약 딸 수빈이가 골프를 한다고 하면?

박길용 : 딸은 예쁘게 키우고 싶은데. 벌써 아버지는 수빈이를 골프 선수 시키라고 하신다. 만약 딸이 골프에 재미를 느끼고 하고 싶다고 한다면 크게 반대는 못할 것 같다. 내가 가장 많이 알고 있는 게 골프고 딸과 함께 하면서 많은 교감을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아직은 아내에게 말하지 않았는데 큰일이네.

5 골프다이제스트 : 앞으로의 꿈이 있다면?

박길용 : 혹시 기회가 된다면 미국으로 진출해보고 싶다. 투어 플레이어로서의 삶을 살고 싶은 게 지금 꾸고 있는 꿈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가족의 행복이다. 나로 인해 부모님과 아내, 수빈이 그리고 동생들까지 행복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최종 꿈은 내가 살아 있을 때까지 골프를 계속하는 것이다.

 

Park Gil Yong

박길용 : 나이 31세 신장 183cm 학교 덕산초-동남중-호주 로비나스테이트-한국골프대학교 2학년 재학 중 성적 2016년 챌린지투어 3회대회 우승 현재 동서울골프연습장 인스트럭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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