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널드 파머가 남긴 찬란한 유산 [Feature :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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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널드 파머가 남긴 찬란한 유산 [Feature : 1710]
  • 김기찬
  • 승인 2017.10.24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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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널드 파머가 남긴 찬란한 유산 [Feature : 1710]
아널드 파머가 남긴 찬란한 유산  KEEPING THE KING'S LEGACY ALIVE

골프와 삶을 사랑했던 아널드 파머의 정신은 그의 손자인 샘 손더스를 통해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다. 글_존파인스타인(John Feinstein)



화요일 아침 일찍, 샘 손더스는 클럽하우스에 앉아 있었다. 느긋한 모습에서 그가 그곳을 얼마나 편안하게 느끼는지 드러났다. 다른 골퍼들과 인사를 주고받는 모습에서는 그가 이 클럽의 일부이자 다른 회원들에게 두루 사랑을 받는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손더스는 PGA투어의 스타는 아니다. 2016년에는 페덱스컵 포인트 순위에서 148위에 그치는 바람에 지난 시즌에도 제한된 자격으로 참가했다. 그의 2017년 목표는 단순했다. 125위권에 들어서 처음으로 플레이오프에도 출전하고 다음 시즌에 전 경기 출전권을 획득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129위에 그쳤다. “7월 말이면 서른이 된다.” 6월 말에 만났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진심으로 30대에는 최고의 실력을 발휘할 준비가 됐다고 생각한다. 나는 여전히 발전해가는 중이다.” 손더스는 모든 면에서 투어의 젊은 선수들과 다를 게 없다. 열심히 연습하고 많은 발전을 이룬 끝에 지금의 자리에까지 온 것이다. 하지만 그가 도달하고자 하는 곳까지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그 점 하나만 다를 뿐이다.

6월 말의 어느 날, 대화를 시작하고 10분쯤 지났을 때 나는 마침내 아널드 파머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지금까지 인터뷰하면서 할아버지 이름이 나오기까지 가장 오래 걸린 것 같네요.” 손더스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리고 그 점에 대해 그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늘 그랬던 건 아니다. 처음 프로로 전향해서 마치 그의 얼굴에 ‘샘 손더스, 아널드 파머의 손자’라고 써 있는 것 같았을 때는 확실히 부담이었다. “아예 그게 제 이름인 것 같았어요. 지금이야 그렇게 알려지는 게 행복하죠. 아주 자랑스럽고요.” 손더스는 자신의 할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처음으로 확실하게 이해한 때를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열여섯 살의 재능 있는 주니어 골퍼였던 그는 서니해나아마추어의 초청을 받았다. 펜실베이니아주 존스타운에서 해마다 열리는 권위 있는 대회였다. “실력 있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손더스는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트립 퀴니와 네이선 스미스 같은 선수들. 오래전부터 활동하면서 많은 성공을 거둔 사람들이었죠.” 그는 말을 이었다. “대부분은 나보다 나이가 많았고 훨씬 실력이 뛰어났으며 당연히 경험도 많았어요. 그런데도 다들 내게 다가와서 인사를 하고는 얘기를 나누고 싶어 했어요. 난 그냥 어린 꼬마, 실력 있는 주니어였을 뿐인데. 물론 다들 실제로는 나하고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게 아니라, 우리 할아버지에 관해 얘기하고 싶었던 거죠. 그들은 할아버지에 대한 모든 걸 알고 싶어 했어요. 그러면서 자신의 골프 인생에 우리 할아버지가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털어놓았죠. 할아버지가 단순히 위대한 선수가 아니라는 걸 제대로 깨달은 건 바로 그 대회에서였어요. 그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가 메이저 대회의 챔피언을 한참 뛰어넘는 골프계의 아이콘이라는 걸 알게 된 거예요.” 손더스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그가 아널드 파머라는 걸 깨달은 거죠. 메이저 대회에서 여러 번 우승한 사람은 많아요. 하지만 아널드 파머는 단 한 명뿐이죠.” 손더스는 자신이 아널드 파머의 반열, 심지어 아널드 파머라는 사람에게조차 근접하지 못하리라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지난해 9월25일에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로 그는 자신이 할아버지의 유산을 간직하고 지켜나갈 적임자라는 걸 입증하고 있다. 장례식 이후에 가진 여러 번의 인터뷰에서는 명석하고 통찰력이 느껴졌으며 감동적이었다. 전국적으로 중계된 그의 추도사도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그는 메모도 없이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말을 했다. “샘은 할아버지의 후광을 불편해하지 않았고 그것에 대해 떠벌린 적도 없어요.” 클렘슨대학 시절에 손더스의 룸메이트였고, 지금은 투어에서 가장 가까운 친구인 벤 마틴(Ben Martin)의 말이다. “그런데도 그를 아는 나조차 그 추도사를 들으면서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정말 감동적이었어요.” 놀라지 않은 건 아널드 파머의 둘째 딸이자 샘과 세 누이의 엄마인 에이미 손더스(Amy Saunders)도 마찬가지였다. “온 가족이 한데 모여 얘기를 했어요.” 그녀는 말했다. “구체적으로 무슨 얘기를 할지. 정말 중요한 건 뭔지. 결국 다들 그를 쳐다보면서 이렇게 말했죠. ‘그냥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얘기해. 그렇게만 하면 괜찮을 거야.’ 샘은 바로 그렇게 한 거예요.” 두 할아버지를 모두 여의다 파머는 여든일곱 살이었고 건강상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으며 심장 수술을 받기 위해 피츠버그의 병원에 입원한 상태였지만, 라이더컵을 닷새 앞둔 일요일 저녁에 전해진 사망 소식은 손더스와 그의 가족에게도 충격이었다. “그날 오후, 한 4시30분쯤 할아버지와 통화를 했습니다.” 손더스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켈리가 할아버지의 수술 일정을 일깨워주며 전화를 드리라고 하더군요. 목소리는 괜찮았어요. 수술을 받고 나며 기분이 좋아질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할아버지에게 수술이 끝나면 전화를 달라고 했고 사랑한다고 말했어요. 할아버지도 사랑한다고 말했습니다. 재미있는 건, 우리가 전화로는 그런 얘기를 그렇게 자주 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날 그 얘기를 해서 정말 다행이었어요.” 4시간 후 전화벨이 울렸다. 아버지의 전화번호였다. 샘은 그날 오전에 로이 손더스와 이미 통화를 한 터였고 다시 전화가 올 일은 없었다. 수화기를 들면서 샘의 마음은 불안감에 휩싸였다. “아버지는 친할아버지인 밥 손더스와 함께 있었어요. 친할아버지를 우리는 팝이라고 불렀죠. 그도 오래 아팠고 똑같이 여든일곱 살이었어요. 혹시라도 팝이 세상을 떠났다는 전화일까 봐 겁이 났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다른 소식을 전해왔어요.” 세상을 떠난 건 덤피(샘과 그의 누나들이 아널드를 부르던 애칭)였다. 한 달 후에는 팝도 숨을 거두면서 손더스 가족은 더 깊은 슬픔에 잠겼다. 아버지의 전화에 놀라기는 했지만, 샘은 슬퍼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할아버지는 오래전부터 이런 상황에 대해 준비를 시켰어요.” 그는 말했다. “아시잖아요, 할아버지가 모든 면에서 구식이었다는 걸. 저는 가족 중 가장 어리지만, 당신이 세상을 떠나면 내가 가족을 대표해야 한다는 말을 여러 번 했죠. 특히 프로 선수로서 골프계 쪽에서는 제가 앞에 나서야 한다고 했습니다. 세 누나에게 전화해서 ‘당장 비행기 표를 예약하고 펜실베이니아에 와서 어머니를 도와드리라’고 말했습니다. 모두가 한자리에 모였을 때 가족 중 누군가 추도사를 해야 한다고 합의를 봤습니다. 다들 저를 쳐다보더군요. 힘들었어요. 정말 힘들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렇지 않았어요. 할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워낙 많았거든요.” 추도사를 하면서 손더스는 할아버지와의 일화를 이야기했다. “할아버지가 전화를 받고 하는 말은 늘 똑같았습니다. ‘너 어디니?’ 그날도 그렇게 물으셔서 ‘저는 집인데, 할아버지는 어디세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대통령과 함께 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어디 대통령이오?’” (샘은 이 부분에서 잠시 말을 멈추고 웃음을 터트렸다.) “할아버지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어요. ‘미국 대통령이지. 지금 백악관 집무실에 있어.’ 그래서 또 제가 말했어요. ‘그런데 전화는 왜 받으셨어요?’ 그러자 할아버지가 말했습니다. ‘그야 너랑 얘기하고 싶었으니까.’” 손더스는 다시 말을 멈췄다. 이번에는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서였다. “할아버지는 늘 저와 얘기를 하고 싶어 했어요. 늘 저희들과 얘기를 하고 싶어 했죠.”

<파머가 남긴 사업체와 자선단체>

아널드 파머는 세상을 떠나기 한참 전부터 자신의 사후에도 자신이 일군 사업체와 자선단체를 지속해나갈 방법을 모색했다. “한 7년쯤 전에 아널드 파머 집행위원회를 구성했다.” IMG에서 45년 그리고 파머의 에이전트로 40년을 일했던 앨러스테어 존스턴(Alastair Johnston)의 말이다. “구성 인원은 모두 네 명으로, 아널드와 나, 에이미 손더스(파머의 둘째 딸) 그리고 우리의 내부 자문인 스티브 리처즈(Steve Richards)였다. 우리는 자주 만나서 그 당시와 앞으로의 사업에 대해 논의했다. 아널드는 한 번도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고 우리에게 일임했다.” 가장 주요한 건 아니스아미 자선 재단을 파머의 유지를 이어나갈 위치에 올려놓는 것이었다. 파머는 유서를 통해 1000만 달러에 가까운 돈을 아니스아미 앞으로 남겼다. 죽기 2년 전에 서약한 것으로 그가 생전에 지원하기로 약속한 훨씬 큰 금액의 차감 잔액이었다.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모금된 금액의 상당 부분은 파머의 죽은 전처의 이름을 딴 위니파머 여성아동병원으로 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집행 위원회는 아널드파머인비테이셔널과 아널드파머컵을 운영하는 재단을 더 확장할 계획을 갖고 있다. 내년에는 대학 선수들을 대상으로 한 파머컵을 현재의 24명에서 48명으로 확대하고 여학생을 포함시킬 예정이다. 팀별로 경쟁을 펼치며 대진 구성도 과거의 미국 대 유럽 대신 미국 대 전 세계로 변경된다. 올랜도의 WESH-TV가 지난가을에 최초로 확보한 법원 문서에 따르면 파머의 자산은 총 8억7500만 달러에 달한다. 부인인 키트가 1000만 달러를 받고 자산의 대부분은 파머의 두 딸인 페기와 에이미 앞으로 남겨졌다. 존스턴에 따르면 에이미 손더스가 집행 위원회의 책임자로 지명됐다. 코스 설계와 시니어 단지, 차 판매, 자동차와 라이선스(현재 아시아에서는 우산 로고가 박힌 다양한 상품을 판매하고 있다)를 포함한 파머의 다른 사업체는 기존에 맡았던 사람들이 계속 진행하게 된다. 파머를 알고 있던 사람들이 유서에서 유일하게 놀란 부분은 파머의 홍보 담당으로 51년간 절친한 친구이자 오른손 역할을 했던 닥 기핀(Doc Giffin) 앞으로 남긴 2만5000달러였다. 기핀을 비롯한 여덟 명의 직원이 그만큼의 액수를 유산으로 받았다. “아널드는 닥이 재정적으로 불편하지 않게 여생을 살 수 있도록 신경 쓰라고 내게 특별히 지시했다.” 존스턴은 말했다. “그리고 나는 그 지시를 어김없이 따를 것이다.” 올해 여든여덟 살인 기핀은 자신의 말을 빌리자면 ‘사실상’ 은퇴했지만, 요청이 있으면 파머의 라트로브 사무실에 이따금 나오곤 한다. 그렇다면 앞으로 샘 손더스의 역할은 뭘까? “사실상 그가 원하는 건 뭐든지 될 수 있다.” 존스턴은 말했다. “아널드가 세상을 떠난 후로 그는 매우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나는 에이미를 통해 그에게 사업의 현황을 알려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다들 그가 플레이에 전념하면서 꿈을 추구하기를 바란다. 아널드도 그걸 원했을 것이다. 그가 가족의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데는 따로 시한이 정해져 있지 않다. 모든 건 전적으로 그에게 달려 있다.” _J.F.

"한 번은 제게 플레이가 잘 안 풀리면 기분이 어떠냐고 물어봤어요," 손더스는 말했다. "그래서 대답했죠.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해도 중단할 수 없을 것 처럼 완전히 무기력한 기분이라고. 그러자 할아버지가 저를 바라보면서 말했어요. '나도 꼭 그랬단다. 다들 그래, 그러다가 그런 상황이 멈추게 되지." - 샘 손더스 그의 할아버지 아널드 파머와의 대화에서

그 이름의 후광과 무게 할아버지와 9월의 그때에 대해 이야기할 때 손더스는 퀴큰론스내셔널 대회를 앞두고 있었다. 토너먼트를 앞둔 그의 일정은 여느 페덱스컵 138위 선수와는 사뭇 달랐다. 월요일에는 자선 대회에 출전했고, 그런 다음 화요일에는 PGA투어의 제이 모너핸 커미셔너 그리고 몇몇 선수들과 함께 백악관을 방문했다. 그들은 대통령 집무실로 초청됐고 개인 공간으로 이동해서 트럼프 대통령과 시간을 보냈다.

“지금까지 할아버지 덕분에 많은 혜택을 누렸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손더스는 말했다. “제 실력으로는 받기 힘든 면제와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건 꼭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월요일의 프로암에 참가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분의 손자로서 제가 얼마나 운이 좋았는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죠.” 늘 그랬던 건 아니다. 클렘슨을 3학년까지 다닌 다음 프로로 전향했을 때는 끊임없이 언급되는 가계도가 족쇄처럼 느껴진 적도 있었다.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실패하는 건 정말 힘든 노릇입니다.” 그는 말했다. “더구나 정작 저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모든 사람이 제가 누구인지 알고 있을 때는 특히 더 그렇죠.”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가 마음을 바꾸게 된 때가 기억나네요. 어느 대회였나, 스폰서 초청으로 플레이하고 있었는데 금요일 늦은 시각에 우리 조의 세 명은 전부 컷 탈락이 거의 확정된 상황이었어요. 경기 위원이 오더니 어두워지기 전에 플레이를 마치기 힘들겠다면서 우리가 전부 기권한다면 한결 일이 수월해질 것 같다는 눈치를 주더군요. 그러면 우리는 일요일 아침에 다시 나올 필요가 없고 그들은 티오프 타임을 조금 늦출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전부 기권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순식간에 응석받이에다 역경을 헤쳐 나갈지 모르는 전형적인 금수저라고 저를 비난하는 글로 트위터가 터져나갈 지경이 됐어요. 정말 속상했죠. 켈리가 저를 불러 앉히더니 이런 일로 속상해하면 안 된다고 하더군요. 골프에 관한 한 제가 만족시켜야 할 유일한 사람은 저라면서요. 그녀가 옳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날 당장 트위터를 끊었고 그 이후로 한 번도 하지 않았어요.”

손더스가 구식이라는 걸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할아버지처럼 그 역시 골프와 관련된 첨단 기술이나 요즘 선수들이 대동하고 다니는 수행원들의 필요를 믿지 않는다. 그에게 스윙 코치가 있었다면 어려서 게임을 가르쳐준 아버지뿐이다. 그에게는 스포츠 심리학자나 개인 트레이너, 마사지사, 심지어 그 흔한 에이전트조차 없다. 10대 시절에 주니어 스타가 됐을 때(그는 한때 미국 주니어 랭킹 1위였다) 할아버지는 그에게 프로 생활의 변덕스러운 유행에 대해 말해줬고 프로가 된 후에도 다르지 않았다. “한번은 제게 플레이가 잘 안 풀리면 기분이 어떠냐고 물어봤어요.” 손더스는 말했다. “그래서 대답했죠.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해도 중단할 수 없을 것처럼 완전히 무기력한 기분이라고. 그러자 할아버지가 저를 바라보면서 말했어요. ‘나도 꼭 그랬단다. 다들 그래. 그러다가 그런 상황이 멈추게 되지. 그걸 늘 기억해야 해. 그 상황이 나아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선 안 돼. 왜냐하면, 계속 노력할 경우 중단될 테니까.’”

마틴은 손더스의 클렘슨 시절을 떠올렸다. “주니어 시절에 워낙 실력이 뛰어난 친구였기 때문에 대학 시절에 이따금 좌절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포기한다거나 자책한다는 느낌은 한 번도 받은 적이 없어요. 프로가 된 후에도 마찬가지였죠. 그게 쉬운 일이 아닌데, 그는 꾸준히 실력을 키워왔습니다.” 선수들의 말마따나 그건 하나의 과정이었다. 손더스는 180cm의 키에 몸무게는 81.6kg이고, 갈색 곱슬머리와 각진 턱에 웃는 인상이다. 그의 비거리는 충분히 긴 편이지만, 강타자 천지가 되어버린 투어에서는 강타자 축에 끼지 못한다. 할아버지가 그랬듯이 그도 기술이 골프를 삼켜버릴까 봐 걱정이지만, 실력 향상의 관건은 (수많은 선수와 마찬가지로) 퍼팅이라고 믿는다. “지금은 볼 스트라이킹을 걱정하는 대신 퍼팅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그는 말했다. “앞으로 10년 안에 노력의 결과를 보게 될 것 같아요.”

“제 할아버지를 비롯해서 몹시 어려운 것들, 이를테면 PGA투어에 진출하고 거기서 우승을 차지하는 것을 쉬워 보이게 만든 분들이 몇 분 계시죠. 그건 쉽지 않아요. 제가 지금 여기까지 오는 건 정말 힘들었거든요. 어릴 때는 세계 최고의 선수가 되고 싶었어요. 여기서 활동하는 선수 중에 한때 그런 꿈을 꾸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겁니다. 제가 아는 사람 중에는 실력이 정말 뛰어난데도 미니투어에서 활동하거나 아예 선수 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투어에 진출했다는 것만 해도 얼마나 행운인지 저는 잘 알아요. 우승을 하고 싶어요. 한번은 정말 좋은 기회를 잡았고(2015년에 플레이오프에서 패한 푸에르토리코) 다른 대회에서도 우승권에서 추격전을 벌였어요. 실력은 충분하다고 믿습니다.”

손더스는 투어에서 자신의 색을 발휘하고 싶지만, 할아버지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맡아야 하는 역할이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사업은 다른 사람들에게 맡길 예정이다. 그가 해야 할 일은 아널드 파머가 잊히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다. “샘은 기꺼이 그 역할을 맡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에이미 손더스는 말했다. “아버지는 가끔 샘을 거칠게 다루기도 했어요. 몇 번인가 로이와 제게 우리가 아이를 너무 무르게 대한다는 말도 했죠. 샘은 할아버지에게 배우면서 할아버지를 대하는 법도 배웠어요. 한번은 아버지가 샘을 세차게 몰아붙였는데, 샘도 어느 정도 맞받아쳤다는 얘기를 아이가 하더군요. 그게 중요했던 것 같아요. 아버지는 아이가 물러서지 않았다는 점을 높이 샀어요. 두 사람에게 좋은 계기가 됐죠.”

손더스는 그 일이 연습장에서 벌어졌다고 말했다. “할아버지가 저를 몰아붙였고 저도 맞받아쳤어요. 할아버지는 그걸 좋아했어요. 우리 둘에게 아주 중요한 날이었던 것 같아요.” 손더스와 켈리는 그가 웹닷컴투어에서 활동하던 2011년에 콜로라도에서 만났다. 두 사람은 1년 뒤에 결혼했고 포트콜린스에 정착했다. 지금은 애틀랜틱 비치에 살고 있다. 잭슨빌과 폰테베드라 비치 중간쯤 되는 곳이다. 그리고 올랜도에서 자동차로 2시간 거리라는 점도 중요하다. 올랜도는 손더스가 부모와 함께 아널드파머인비테이셔널을 계속 추진해나갈 곳이다. “해마다 계속해서 좋은 선수들이 참가하고 할아버지가 원했던 대로 대회를 계속 키워나가고 싶고, 그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는 말했다. “이제 그 책임을 제가 져야 한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는 다시 한번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걸 저도 원합니다.”

그 일을 하기에 아널드 파머의 손자보다 더 완벽한 준비를 갖춘 사람은 없을 거라고 말해도 될 것 같다. “해야 하는 일이라면 뭐든 할 준비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말했다. “오래전부터 이것에 대비해왔죠.” 그는 또다시 미소를 지었다. “할아버지가 준비를 제대로 시켰거든요.” 손더스는 아널드라면 어떻게 했을지 궁금해할 필요가 없다. 그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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