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친왕과 골프 [Feature :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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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친왕과 골프 [Feature : 1709]
  • 김기찬
  • 승인 2017.09.11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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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친왕과 골프 [Feature : 1709]
영친왕과 골프

영친왕은 한국 골프 발전에 주요한 인물로 꼽힌다. 영친왕을 중심으로 한 골프 인사들과의 관계와 주요 행적, 새로운 골프 이야기를 풀어본다. 글_조상우 / 정리_인혜정

대한제국의 마지막 왕위를 계승한 영친왕은 한국 골프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 영친왕의 본명은 이은, 1897년 고종의 7남으로 태어나 1907년 11월 황태자로 책봉된다. 하지만 그해 12월 10세의 나이에 이토 히로부미의 손에 이끌려 유학이라는 명분으로 볼모가 되어 일본으로 떠났다. 영친왕은 유년기 일본 황족의 교육기관인 학습원을 거쳐, 1911년 일본 육군 중앙 유년학교를 시작으로 육군사관학교(1915~1917), 육군대학(1920~1923)을 졸업하며 장교의 길을 걷게 된다.

영친왕은 1924년 최초의 조선인 골퍼로 효창원골프장에서 라운드를 즐겼다고 한다. 일본에 골프가 도입된 것은 1901년으로 한국보다 늦다. 한국의 골프 도입 시기는 1897~1900년 사이로, 원산해관에 6홀의 골프 코스가 만들어지며 시작되었다. 영친왕의 태어난 해가 한국 골프가 도입되었다고 제기되었던 1897년, 그리고 당시 일본의 황태자 히로히토가 태어난 해도 일본에 골프가 도입되었다던 1901년이다. 공교롭게도 두 황태자가 출생한 해에 조선과 일본에 골프가 도입됐다.

일본 히로히토 황태자는 16세이던 1917년 7월 여름방학 당시 최고의 슬레진저 히코리 클럽으로 골프에 입문했고 이는 일본 황실 골프의 시발점이 되었다. 1921년 영국 황태자가 방문했을 때 일본 황태자의 취미인 골프가 영일동맹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래서인지 다이쇼 천황은 1922년 황실 전용 골프장을 만들어 황족들에게 골프를 권했다. 영친왕이 일본 황족에 따르는 신분으로 교육을 받아왔다는 사실에 비춰봤을 때 영친왕도 1917년경 골프에 입문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었으나 관련 자료를 정리하다 보니 1924년 일본에서 골프에 입문했다고 한다.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영친왕이 1924년 효창원골프장에서 골프를 즐겼다는 내용은 그의 행적을 추적해봤을 때 신빙성이 떨어진다. 영친왕은 순종에게 육군대학을 졸업했다고 보고하기 위해 1923년 12월30일 조선을 방문했다가 1924년 1월7일 일본으로 돌아간 뒤 재방문했다는 기록이 없다. 그 진위에 대해서는 역사적인 증거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일본 육군 장교였던 영친왕은 자유로운 신분이 아니었다. 그가 조선을 방문하기 위해서는 궁내성의 허락을 받아야 했던 것.



영친왕과 비전하의 유럽 여행단 / 출처:시노다의 일기 영친왕은 일본에서 골프 대회에 출전하는 모습도 보였다. 1925년 3월23일 <매일신보>에 보도된 기사에 따르면, 영친왕은 골프에 심취해 1925년 4월 초순에 거행되는 ‘제2회 동궁컵골프대회’에 참석했다고 전하고 있다.

영친왕의 골프 분야 행적 중 한국 골프 발전에서 높이 평가되는 부분이 군자리골프장 부지다. 그는 30만 평에 이르는 넓은 땅에 골프장 건설 자금 2만 엔과 3년 동안 5000엔의 보조금을 하사해 군자리골프장을 만드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군자리골프장은 원래 영친왕의 이복형제였던 순종의 부인 순명황후의 능이 있던 ‘유릉’이었다. 1926년 4월25일 순종이 승하하게 되자 6월11일 황후의 능을 천장해 그 터로 남아 있던 곳이었다. 이곳에 1927년 6월11일 군자리골프장 공사를 시작했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유교 사상이 강하게 남아 있던 시기에 효창원골프장을 비롯해 청량리골프장과 군자리골프장이 모두 왕실의 묘원에 만들어진 것에 대해 의구심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 군자리 유릉터를 골프장 부지로 물색한 사람은 바로 일본 궁내성 소속, 이왕가의 재산을 관리하던 이왕직의 차관 시노다였다. 시노다는 한국 골프사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로 이왕직 장관, 숙명학원 초대 이사장, 경성제국대학 총장 등을 역임한 자다. 시노다는 1924년 경성골프구락부의 초대 감사를 지내며, 청량리골프장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이왕직 차관으로서 골프장 부지사용에 적극적으로 협조한다. 또 군자리골프장의 부지 무상 사용 허가, 건설 자금과 보조금까지도 영친왕으로부터 지원받는 역할을 했다. 당시 화폐 가치를 평가한다면, 백미 10kg이 1엔 60전, 목수의 일당이 1엔 80전, 대졸 사무원 초임이 70엔 정도라 하니 골프장 건설 자금 2만 엔과 운영비 5000엔은 적은 돈이 아니었다. 일제강점기 이왕가는 기존 자산 외에 조선총독부로부터 매년 150만 엔을 받았다. 일본에 있던 영친왕은 매년 40만 엔 정도를 송금받아 일본 황족들이 받던 황족비보다 3배에서 10배에 이르는 많은 돈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골프장 건설 자금을 지원하는 데 무리는 없었을 것이다.






 

영친왕은 일본 황족이었던 비전하(이방자)와 1920년 결혼하기 전까지 조선 방문이 제한됐다. 결혼 후 1년에 1회에서 2회 정도 조선 방문이 허용돼 국내 실정을 직접 보고 들을 수 있었다. 1910년 대한제국이 망국의 길을 걷게 되자 황실은 이왕가로 전락했고, 이왕가와 관련된 업무 일체는 이왕직이라는 기관에서 담당했다. 1926년 순종이 승하하고 영친왕이 왕위를 계승하자 이왕직 장관이나 차관이 6개월에 한 번씩 일본을 방문해 이왕가에 관련된 일을 보고했다고 전한다. 필자는 예전부터 이왕직 차관이었던 시노다(재직 기간 : 1923~1931)가 청량리골프장은 물론 군자리골프장을 건설하는 데 이왕가와 영친왕으로부터 왕실의 능터를 골프장으로 만드는 것을 어떻게 승낙받았을까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1 유럽 여행 중 선상에서 골프하는 영친왕 / 출처 : <동아일보> 2 비전하의 갑판 골프 / 출처 : 시노다의 일기 이 모든 의문을 풀어준 것은 바로 영친왕과 비전하가 1927년 5월부터 1928년 4월까지 떠난 유럽 여행의 일정을 기록한 시노다의 일기였다. 시노다는 1920년 4월28일 영친왕과 결혼한 비전하(이방자)를 모시던 사무관으로, 영전해 이왕직 차관이 되었다. 영친왕은 1926년 3월 유럽시찰을 떠나려 했지만 순종이 승하하면서 계획이 미뤄졌다. 왕위를 계승한 뒤 일본 궁내성의 반대에 부딪혀 불가능한 상태에 놓이게 된 것. 하지만 시노다가 1927년 궁내성을 어렵게 설득해 영친왕이 바라던 유럽 여행을 1년간 떠나게 됐고 이 과정에서 영친왕과 밀접한 관계를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위에서 군자리골프장 건설이 언급된 것이 1927년 언제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하지만 공사가 6월11일에 시작됐다고 하니, 1927년 4월10일 순종 1주기를 맞아 조선을 방문한 20일 동안, 유럽 여행 기회를 만들어준 시노다의 간청이 그 같은 지원을 승낙하게 된 배경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영친왕과 비전하의 유럽 여행은 시노다 이왕직 차관, 시종무관 사토 중좌, 염택 대좌를 비롯해 전의, 촉탁*, 어용괘*, 시녀 까지 일곱명이 수행했다. 5월23일 일본 동경에서 출발해 유럽으로 가는 긴 여정에 오르게 된다. 영친왕은 상해, 홍콩,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 아시아 국가를 거쳐 예멘, 이집트의 중동 국가와 프랑스, 스위스, 영국,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 폴란드,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이탈리아 등의 유럽 주요 국가를 1년여의 기간 동안 방문했다. 전적지, 박물관, 유적지, 병원, 대학, 학교, 음악당, 미술관, 성당, 공장, 비행장을 방문하며 각국의 현황을 살폈다. 필자가 시노다의 일기를 보기 전까지는 영친왕의 골프 관련 활동과 지원에 대해 이왕직의 주도하에 어쩔 수 없이 왕실의 능터를 골프장으로 허가하고 지원금을 하사한 것으로 보았다. 1927년 경성골프구락부의 명예 총재가 된 것도 형식적인 것으로 생각해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일기를 읽으며 유럽 여러 나라에서 보여준 영친왕의 골프 사랑은 골프인의 한 사람으로서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 여행이 마치 골프 여행인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1927년 세인트앤드류스 골프장에서의 영친왕 / 출처 : <사진으로 보는 한국골프사> 유럽 여행에서 영친왕은 30회 이상 골프장을 방문해 골프를 즐겼다. 싱가포르에 도착한 다음 날인 6월9일의 첫 라운드를 시작으로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이탈리아 등의 나라에서 골프행보를 이어간다. 영국에서는 골프 라운드는 물론이거니와 골프 학교, 골프의 본산 세인트앤드루스 방문, 골프공 제조 공장까지 방문하며 애정을 보였다. 네덜란드에서는 골프의 발원지라고 불리는 ‘콜벤’ 경기장을 찾았고 1928년 2월 프랑스 니스에 머무는 동안에는 평균 이삼일에 한 번 정도 총 9회에 걸쳐 골프를 즐겼다. 영친왕은 비전하, 시노다를 비롯한 사토 중좌, 염택 대좌와 동반하기도 했다. 8월29일 세인트앤드루스에서 영친왕은 현지 프로와 라운드를 했고, 시노다 차관(116타)은 염택 대좌(118타)와 라운드를 가졌다. 영친왕은 30일에도 골프를 즐겼고 31일에는 수행원들과 경기하며 시노다 107타, 영친왕 121타, 염택 대좌 124타, 사토 중좌 137타를 기록했다. 이 일기에서 눈여겨볼 것은 두 전하가 여행 중 선상에서 ‘갑판 골프’를 즐겼다는 부분이다. 갑판 골프는 갑판에 둥근 원을 그려놓고 그 안에 아이스하키의 퍽과 비슷한 것을 넣는 놀이다. 이 놀이의 기원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당시 일본 군함을 비롯한 모든 배에서 행해지던 놀이다. 왼쪽 1번 사진은 유럽 여행 중 선상에서 골프를 하는 영친왕의 모습이라고 기사가 났다. 하지만 골프 연습을 하는 건지 아니면 비전하와 같이 갑판 골프를 하는 건지 알 수는 없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갑판 골프로 여겨진다. 군자리골프장의 개장은 일본인 중심에서 점차 조선인들도 활발하게 참여하는 골프문화의 시발점이 되었다. 아픈 과거지만 우리가 골프 선진국 대열에 오르는 초석이었으니만큼 다시 되새겨봐야 할 역사가 아닌가 싶다.

Cho Sang-Woo 조상우

호서대 스포츠과학부 골프 전공 교수이며, 한국 골프사 연구와 함께 골프 골동품을 수집하고 있다. 슈페리어에서 운영하는 세계골프역사박물관의 자문위원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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