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지의 파란만장한 성장 일기 [스페셜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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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지의 파란만장한 성장 일기 [스페셜 인터뷰]
  • 한이정 기자
  • 승인 2022.10.25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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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가 와도 무표정한 얼굴. 선글라스 뒤에 숨겨놓은 정윤지의 진짜 얼굴을 마주할 시간.

“그래도 언젠가는 할 선수예요.”
2020년 정규투어에 처음 입성했지만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던 정윤지를 바라보는 현장 관계자들은 대부분 이런 평가를 내렸다. 국가대표 상비군을 거쳐 국가대표로 활동했던 그는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아시안게임 여자 골프 단체전 은메달을 획득하고 프로에 왔다.

정윤지가 아시안게임에 같이 나갔던 선수가 유해란과 임희정이다. 하필 유해란은 데뷔 시즌에 우승을 차지하며 신인왕을 거머쥐었고 임희정은 첫해부터 3승을 올렸다. 동료들의 활약에 비해 정윤지의 시작은 뜨뜻미지근했다.

‘잘 할 줄 알았는데 왜 우승을 못 하는 걸까?’ 하는 의문은 3년 차에 풀었다. 지난 5월 E1채리티오픈에서 무려 5차 연장 끝에 생애 첫 승을 거머쥐었다.

‘나인 홀을 해도 괜찮아’
●○● E1채리티오픈 때 극적으로 연장전에 갔다.
내가 연장에 갈 줄은 아예 몰랐다. 내가 챔피언 조보다 일찍 끝났는데 시상식 조여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날 날이 너무 더워서 라운드 내내 힘들었다. 라커룸 의자에 누워 쉬고 있자 싶었는데 갑자기 연락이 왔다. ‘나와서 연습하면서 연장전 대기해.’

●○● 진짜 갑작스러웠을 것 같다.
그때부터 ‘내가 연장에 간다고?’ 싶었다. 살짝 현실 부정도 했다. 너무 날이 더워 힘들어서 연장전도 크게 자신 없었다. 2등이어도 괜찮으니까 빨리 쉬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그래도 연장전 얘기를 들으니 떨리기 시작했다. 

●○● 연장을 5차전까지 치렀다.
이러다 연장으로 나인 홀 하는 거 아닌가 싶었다. 그러다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나인 홀을 하더라도 우승할 수 있으면 괜찮아. 연장을 치를수록 떨리는 마음도 줄었고, 힘들었는데 경기를 하다 보니 힘든 생각도 전혀 안 났다. 최대한 이 경기를 끝까지 끌고 가보자, 내 경기로 끌어보자는 생각이었다.

●○● 긴 연장전에서 떨지도 않고 웃으면서 하더라.
이전 같으면 덜덜 떨었을 것이다. 내 첫 준우승이 2021년 5월 BC카드·한경레이디스컵이었는데, 그때는 퍼터를 잡았는데도 손이 막 떨려서 퍼팅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스스로 차분하게 해야겠다, 빨리 다운시켜야겠다 싶어서 캐디 오빠와 얘기를 많이 했다. 자연스럽게 긴장이 풀려서 웃기도 하고 했는데 그런 모습을 보고 주변에서 떨리지 않았냐고 말을 많이 하셨다.

●○● 18번홀에서 연장을 5번 치는 거면 심리적 압박이 컸을 것 같은데.
그렇다. 처음에는 연장이 그렇게 오래갈지 몰랐다. 계속 똑같은 홀에서만 하니까 압박도 있었는데 오히려 나한테는 좋았다. 그 홀에 집중하지만 다음 연장에 가면 내가 이렇게 해야지, 저렇게 해야지 이런 계산이 나와서 홀을 거듭할수록 더 철저하게 할 수 있었다.

‘나 우승할 수 있겠다’
●○● 언제쯤 우승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딱히 꽂힌 건 없었는데 5차 연장 때 세컨드 샷을 치면서 느꼈다. 그린에 가보니 4차 연장 때와 비슷한 라인에 내 공이 있었다. (지)한솔 언니도 버디 기회였다. 하지만 핀이 마운드 뒤에 꽂혀 있었는데 언니는 마운드를 넘겨야했다. 언니가 퍼트를 잘 하지만 라인이 쉽지 않았다. 그때서야 ‘내가 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 우승 퍼트에 성공하는 순간은 어땠나.
‘드디어 내가 해냈다.’ 이 생각이 정말 컸다. 공을 가지러 가야 했는데 캐디 오빠와 얼싸안고 좋아했다. 평소에 나는 경쟁의식이 좀 있었는데 그 대회만큼은 내 경기에 엄청 집중했다. 그런 적이 처음이었다. 우승 기운이 있구나 싶다.

●○● 지금 우승을 돌이켜보면 어떨까.
옆에 고마운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알았다. 우선 옆에 있는 캐디 오빠. 올해부터 같이 하게 됐는데 말이 잘 통한다. 말을 많이 하는 것은 아니지만 티키타카가 잘 된다고 하지 않나. 예전에 장하나 언니와 했던 캐디 오빠라 믿음직스럽다. 
특히 첫 승에 매니지먼트 매니저 오빠들 공이 컸다. 연장전 내내 그린 쪽에서 기다려줬다. 내가 티잉 에어리어로 카트 타고 이동할 때 엄청 뛰어 따라오면서 ‘화이팅!’, ‘화이팅!’ 소리 지르면서 응원해줬다. 언니들이랑 하니까 기 살려주려고 했던 건지 그게 보기에는 참 웃겼는데 덕분에 긴장도 덜하고 웃으면서 즐길 수 있었다. 오빠들에게 정말 고맙다. 또 오래 기다려준 (조)아연이나 (이)소미 언니, 가족들에게도 고맙다.

●○● 우승하고 나니 달라진 게 있나.
우승하기 전에 ‘내가 우승한다면?’ 떠올렸을 때 마냥 편하기만 할까, 내가 지금 하는 걱정이 사라질까, 오히려 더 무게감이 실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운동 선수로서 우승을 해야 하는 거니까 꼭 하고 싶다 싶었는데 막상 우승을 해보니 심적으로 편안한 게 더 크다. 내가 해냈다는 경험치도 쌓이고, 꾸준히 열심히 하면 또 우승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도 든다.

‘저 진짜 진짜 진짜 할 수 있어요.’
●○● 정윤지 하면 2018년 아시안게임 얘기를 안할 수 없다. 같이 했던 임희정 유해란에 비해 프로 성적이 좋지 않은데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았나.
아니다. 아시안게임은 내게 정말 뿌듯하고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다.

●○● 이유가 있을까.
아시안게임을 할 때쯤 내가 드라이버가 잘 안 맞았다. 엔트리 확정이 됐는데 티 샷이 난사됐다. 엔트리 교체까지 말이 나왔다. 아시안게임 한 달 전에 사전 답사를 가는데 라운드를 하다가 가져간 공을 다 잃어버렸다. 그 정도로 드라이버가 심각했다. 동료들 공을 빌려치고 그랬는데 그때 앞이 정말 깜깜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랐다.

●○● 아시안게임 직전에 드라이버 입스가 온 것인가.
입스까지는 아니었는데 입스 아닌 입스이긴 했다. 부모님이 최대한 빨리 여러 방법을 써보자 하셔서 백방으로 알아보셨고, 멘탈 트레이닝도 받아보고 티 샷 난사를 잘 잡아주는 프로님한테도 소개받아 가보고, 아시안게임을 한 달 앞두고 2주 동안 티 샷을 잡으려고 정말 노력했다. 그래서 좀 괜찮아지기도 했지만 아시안게임이라는 부담감 때문에 또 난사가 됐다.

●○● 엔트리 교체까지 말이 나올 정도면 상황이 심각했을 것 같다.
지금도 그 생각을 많이 한다. 엔트리를 교체했다면 우리 팀이 금메달을 땄을까.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제주도에서 합숙 훈련을 했는데 그때 코치님이 나를 잠시 부르셨다. ‘정말 할 수 있겠냐’고 물으시더라. 중요한 경기이고, 협회나 윗분들도 네 드라이버가 안 맞는다는 걸 다 알고 계시다면서. 네가 괜찮아졌다고 해도 대회에 나가면 부담이 심할 테니 엔트리 교체하는 게 어떻겠냐고 물으셨다.

●○● 스스로 엔트리 교체까지 생각하긴 했었나.
다른 국제 대회도 있기는 했지만 내가 만약에 엔트리 교체를 하면 나는 어느 대회도 나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코치님한테 “몇 주 만에 훨씬 좋아졌고, 아시안게임 전까지 더 좋아질 수 있어요. 해보겠습니다. 저 진짜 할 수 있어요. 진짜 진짜 진짜 한번 해볼게요.” 몇 번이고 다짐하고 갔던 대회다.

●○● 그래도 한 달 안에 교정하기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다행히 페어웨이 우드는 너무 잘 맞았다. 그래서 엄청 고민하다가 과감하게 드라이버를 버렸다. 유일하게 페어웨이 우드로만 다 티 샷을 했던 경기다. 18개 홀 중에 한 홀이 폭이 되게 넓어서 미스가 나도 커버할 수 있는 곳이라 그 홀에서만 드라이버를 쳤고 나머지는 다 페어웨이 우드로 티 샷을 했다.

●○● 그래서 메달 획득이 더 값지게 다가왔나보다.
1~2라운드 때 스코어를 많이 잃지는 않았는데 3라운드 때 내가 5언더파를 쳤다. 사람들이 다 놀라더라. 입스 아닌 입스를 겪는 애가 5언더파를 치니까. 사람들은 내가 팀에 기여를 못할 거라 생각했다. 그때 돌이켜보면 힘들긴 했지만 어려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다했고, 은메달이 아쉽긴 하지만 아시안게임이 내 꼬리표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많은 걸 느꼈던 대회다.

선글라스를 꼭 착용하는 정윤지에게 이유를 물었다. “경기할 때 강해보이잖아요.”
선글라스를 벗고 코스 밖에 나오면 영락없는 20대 초반 모습이다. 사진=KLPGA 제공

‘현재에 집중!’
●○● KLPGA투어에서 ‘인싸’라고 들었다. 성적이 좋으면 축하 메시지도 많이 받던데.
주변 분들이 꼭 우승을 하지 않더라도 잘 했다고 응원을 많이 해주시더라. 나를 축하해주고 응원해 주시는 분들께 모두 답변해드리고 싶어서 하다 보니 많아 보이는 게 아닐까. 내 매력이 뭘까? 난 잘 모르겠다! 

●○● 우승 후 지금까지 챔피언 조에서 세 번이나 뛰고 전반적인 흐름은 좋은 것 같다.
특히 KB금융스타챔피언십 때는 처음으로 홀인원도 해보고, 챔피언 조에서 쟁쟁한 언니들과 쳐본 게 처음이라 긴장도 됐다. 박민지 언니랑 쳐본 것은 정말 처음이었는데 정말 잘하더라. 

●○● 올해 시즌 준비하는 것부터 힘들었다고 들었다.
올해는 잘 해보려고 전지 훈련도 나름 굳게 결심하고 갔는데 계획대로 잘 되지 않았다. 미국에서 예정보다 빨리 귀국했다. 거기에 코로나19까지 걸려 힘들었다. 하지만 힘든 일을 겪으면서 단단해졌다. 나를 되돌아보는 시간도 가졌고 오지 않은 것을 걱정하지 말자 하면서 현재에 집중했다.

●○● 말 그대로 많은 걸 경험하는 시즌이다. 아직 시즌이 끝나지 않았지만 어떤가.
경기하면서 떠오르는 생각이나 행동을 보면 나 스스로도 ‘어? 나 많이 성장했네.’ 하고 느낀다. 나는 생각이 많아지면 혼자 시간을 많이 보내야 하는 편이다. 그러다 보면 생각도 정리되고 비우기도 한다. 이런 것도 투어 1~2년 차 때보다는 많이 좋아진 것 같다. 올해 내가 발전한 부분이다.

●○● 하반기는 투어 일정이 더 바쁘다.
메이저 대회도 많고, 상반기보다 많이 바빠졌다. 학교에 다니기 시작해서 그런 것 같다. 지금 3학년인데 코로나19 때문에 계속 비대면으로 수업하다가 이번 학기부터 대면 수업을 해서 월요일마다 학교에 간다. 그래서 정신없이 바쁘다 보니 생각에 빠질 겨를이 없다. 좋은 방법은 아닌 것 같지만 워낙 바빠서 현재에 집중하게 되는 것 같다.

●○● 역전 우승도 했고, 꾸준히 상위권에도 든다. 앞으로 해보고 싶은 게 있다면?
해보고 싶은 것은…많다. 와이어 투 와이어 우승 이런 것도 해보고 싶다. 나는 연장전에서 이겼으니 어떻게 보면 역전 우승이지만 챔피언 조에서 플레이 해 보니 마지막 홀은 코스 개방을 하더라. 갤러리에 둘러싸여 챔피언 퍼트를 넣는 걸 직접 보니 정말 멋있었다. 챔피언 조에서 많은 분들의 환호를 받으며 우승해보고 싶다. 골프 외에는? 연애. 지금 내 나이 때만 경험할 수 있는 그런 것도 즐겨보고 싶다.

[사진=김시형(49비주얼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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