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y Season : 빗속 골프 전쟁 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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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iny Season : 빗속 골프 전쟁 일지
  • 김성준 기자
  • 승인 2021.07.06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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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과 내기 골프에서 처참하게 짓밟힌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건만, 복수 기회가 생각보다 이르게 왔다. 내일 오전 7시 30분 티오프. 비 예보가 있지만 플레이 조건은 동등하다. 이 전쟁에서 더 물러설 곳은 없다. 

■ 전쟁 하루 전-PM 9:00-드레스 룸

빗속 전쟁에 필요한 군장을 챙겼다. 옷장 구석에서 친구가 기증한(버린) 비옷을 겨우 찾아냈다. 냄새가 조금 나지만 쓸 만한 것 같다. 비 오는 날 천연 가죽 장갑은 미끄럽다는 상식쯤은 알고 있다. 낡아서 쓰지 않는 연습용 합성피혁 장갑이 많기에 걱정은 없다. 흐린 날씨에 컬러 볼이 잘 보일 것 같아 선물 받은 형광 볼도 넉넉히 챙겼다. 침대에 누워 동영상 레슨을 찾아봤다. 비 오는 날 스윙을 천천히 해야 어깨 회전이 끝까지 된다는 레슨이 눈에 들어온다. 내일이면 두둑해질 지갑을 상상하며 꿀잠을 청해본다.

■ 전쟁 개시일-AM 5:00-침대

알람 소리에 눈뜨자마자 스마트폰으로 기상을 체크했다. 강수 확률 90%, 강수량은 시간당 5~10mm다. 검색해보니 추적추적 내리는 비라고 한다. 이 정도 비라면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낚시광 아버지께서 알려주신 해외 날씨 애플리케이션 윈디(Windy)를 통해 시뮬레이션까지 해봤다. 친구들에게 “우천 취소는 없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전투식량으로 즉석 밥을 데웠다.

■ AM 5:30-식탁

간단하게 식사를 마치고 스마트폰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검색하니 전장까지 1시간 걸린다는 예상 시간이 나온다. 비가 오면 교통 상황이 수시로 변하니 서둘러 차에 올랐다.

■ AM 6:30-클럽하우스

골프장에 도착하니 예상보다 비가 더 많이 내린다. 골프장 프런트에서 혹시 모를 플레이 중단 사태에 대비해 홀별 정산에 대해 알려줬다. 이곳은 티 샷을 기준으로 홀별 정산을 한다는 내용이다. 골프장에서 휴장을 선언하지 않는다면 플레이를 중단할 생각이 없다. 이건 전쟁이다.

■ AM 7:30-1번홀 티잉 에어리어

자신감 넘치는 걸음으로 1번 티에 도착했다. 그런데 친구들을 보자 위화감이 든다. 가벼워 보이는 이중 구조의 우산 안에 프로 골퍼들처럼 수건까지 걸어놨다. 또 좋은 비옷을 샀다며 자랑을 늘어놓는다. 굳이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지만, 철저하게 준비한 친구들을 보니 내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한 것 같아 조금 당황스럽다. 혹시 골프백 안에 수건이 있는지 찾아봤지만 역시 없다. 방수 모자까지 챙겨온 친구들의 모습에 시작부터 지고 있는 느낌이 든다. 실력에는 밀려도 장비에는 밀리지 말라던 아버지의 말씀이 뒤늦게 떠오른다. 하지만 골프는 장갑을 벗어봐야 안다. 총알도 넉넉히 준비해서 마음은 든든하다.

■ AM 7:50-2번홀 페어웨이

친구들이 공에 묻은 흙을 닦아서 치자며 프리퍼드 라이 룰을 적용하자고 한다. 처음 들어보는 룰이라 캐디에게 슬쩍 물어봤다. 그린에서 마크를 하고 볼을 닦듯 페어웨이에서 공을 닦은 뒤 다시 제자리에 놓고 치면 된다고 작게 말해준다. 캐디님이 내 편인 거 같아 마음이 조금 편해진다.

■ AM 8:15-4번홀 티잉 에어리어

두꺼운 비옷 때문에 스윙이 불편하다. 젖은 그립도 미끄럽다. 스윙 중 클럽을 놓칠 것 같아 골프백에서 여분의 장갑을 꺼냈다. 여유로운 척하며 친구들에게 손이 미끄럽지 않은지 물었다. 나보다 더 여유로운 모습으로 젖어도 미끄럽지 않은 레인 장갑을 사용한다고 한다. 그 얘기를 듣고 나서 나도 모르게 그립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드라이버 샷을 실수해 비거리가 50m 나갔다. 볼이 페널티 구역으로 가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찰나 캐디님이 힘 빼고 스윙하라는 잔소리를 시작했다.

■ AM 9:30-8번홀 페어웨이

어드레스할 때마다 빗물이 자꾸 목 안으로 들어온다. 깃이 높은 친구들의 비옷을 보니 내가 자꾸 초라해 보인다. 골프화도 방수 기능이 떨어졌는지 양말이 조금씩 젖어오는 느낌이다. 새로 산 골프화가 더러워질까 봐 헌 골프화를 신고 온 것이 실책이다. 모자도 젖어 어드레스 시 빗물이 발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페어웨이에는 물웅덩이가 생기기 시작했다. 캐디가 물웅덩이는 템퍼러리 워터(Temporary Water)라며 볼이 들어가면 한 클럽 안에서 드롭을 하라고 알려줬다. 또 퍼팅할 때 모자를 거꾸로 돌려 써보라고 나에게만 살짝 알려준다. 역시 캐디님은 내 편 같다. 하지만 왠지 나 혼자 바쁜 느낌이 든다.

■ AM 9:55-9번홀 그린

플레이 시간이 자꾸 늘어난다. 캐디도 슬슬 힘들어 보인다. 오랜만에 찾아온 파 찬스에서 신중하게 스트로크했지만 퍼트가 계속 짧다. 9번홀을 마치고 잠시 쉬는 시간에 친구들이 양말을 새것으로 갈아 신기 시작했다. 남는 양말이 있는지 물어볼까 잠시 망설였지만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홀로 카트에 앉아 전반전의 실수를 복기해봤다. 그린 근처 짧은 어프로치를 너무 소극적으로 한 것 같다. 지갑을 열어보니 1번홀에서 핸디캡으로 받은 총알은 이미 증발했다. 아쉬운 마음이 가득하지만, 포기는 이르다. 아직 나에게는 절반의 찬스가 남아 있다.

■ AM 10:50-13번홀 티잉 에어리어

드디어 비옷은 전투력을 상실하고 방수가 아닌 흡수를 하고 있다. 젖어버린 비옷 때문에 스윙도 엉성하다. 전투화도 물난리를 겪고 있다. 발도 미끄러워 평소에 하지 않던 실수가 나온다. 점점 무너지는 나를 보는 친구들 입가에 옅은 미소가 보였다. 친구들은 제법 여유 있어 보였다. 이제 남은 홀이 많지 않다.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한다. 지갑은 이미 텅 비었다. 내가 불쌍해 보였는지 친구들이 이제부터 친선 게임으로 가자고 제안한다. 남자답게 대답했다. “묻고 더블로 가.”

■ AM 11:05-14번홀 그린사이드 벙커

세컨드 샷이 짧아 그린 앞 벙커에 빠졌다. 벙커에 들어가 모래에 발을 비벼보니 모래가 젖어 있어 딱딱한 느낌이다. 평소대로 헤드를 열고 스윙을 했더니 토핑이 났다. 옆에서 지켜보던 캐디가 젖은 모래에서 헤드는 스퀘어, 볼 위치는 스탠스 중앙에 놓고 치라고 알려준다. 오늘따라 캐디님이 천사처럼 보인다.

■ AM 11:40-16번홀 페어웨이

급한 마음에 클럽 선택을 잘못해 카트까지 왕복 달리기를 했다. 캐디님도 힘이 드는지 카트 주변에서 맴돈다. 비도 점점 강하게 내린다. 친구가 지면에 박힌 내 볼을 보더니 드롭하게 해준다며 생색을 낸다. 캐디한테 물어보니 박힌 볼은 원래 벌타 없이 구제를 받는다고 한다. 호기롭게 챙긴 컬러 골프공도 두 개밖에 남지 않았다. 어서 집에 가고 싶은 마음뿐이다.

■ PM 12:25-18번홀 그린

지금 내 눈에서 흐르는 것은 빗물이다. 절대 눈물이 아니다. 친구들도 지쳐 보였지만 승자의 여유를 즐기고 있다. 큰 승리를 거둔 친구는 여유롭게 클럽을 정리하며 젖은 그립을 페이퍼 타월로 닦고 있다. 친구가 쿨하게 팁을 얹어 캐디피를 지급한다. 1번홀까지만 해도 내 지갑에 있던 돈이었다. 아직도 눈에서 빗물이 흐른다.

■ PM 12:35-라커 룸

‘멘탈 붕괴’라는 말은 현 상황에 가장 잘 어울리는 표현이다. 설상가상 젖어버린 옷을 넣을 비닐 백도 라커 룸 안에 마련되지 않았다. 라커 룸 직원에게 물어보니 일회용품 줄이기의 일환으로 비닐 백은 더는 제공하지 않는다고 한다. 옆에서 지켜보던 친구가 집에서 가져온 비닐 백 하나를 던져준다. 젖은 신발 안에 넣으라며 페이퍼 타월도 빌려줬다.

■ PM 3:30-집으로 돌아가는 길

오늘따라 집에 가는 길이 멀게 느껴진다. 졸음 쉼터에서 잠시 쉬며 오늘의 치욕스러운 패배를 곱씹어보고 있다. 가장 큰 패인은 준비 부족이라고 생각된다. 아쉽게 복수는 실패했지만 오늘 골프를 교훈 삼아 배우고 느낀 것을 노트에 정리해본다. 

◆ 우중 골프 필승 전략 10

① 비옷은 깃이 높고 방수 기능이 좋은 것으로 사자.

② 레인 장갑, 방수 모자 강력 추천.

③ 우산은 크고 가벼울수록 좋다.

④ 흐린 날씨엔 컬러 볼이 잘 보인다.

⑤ 마른 수건을 넉넉하게 챙기고 중간에 갈아 신을 양말도 준비하자.

⑥ 헌 골프화는 비 올 때 착용하지 말자.

⑦ 서두르지 말고 평소 프리샷 루틴을 지키자.

⑧ 퍼팅은 평소보다 10% 정도 강하게, 그린 주변에서도 과감하게 핀을 노리자.

⑨ 페이퍼 타월과 젖은 옷을 담아갈 비닐 백도 챙기자.

⑩ 티 샷 후 카트에서 클럽을 두 개 이상 챙기고 스윙 전 클럽 페이스를 잘 닦자.

[김성준 골프다이제스트 기자 kimpro@golfdigest.co.kr]

[사진=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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