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 인터뷰] ① 콜린 모리카와, 굴곡 없는 챔피언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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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인터뷰] ① 콜린 모리카와, 굴곡 없는 챔피언 스토리
  • 전민선 기자
  • 승인 2021.03.02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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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는 우리를 롤러코스터에 태운다. 사랑에 빠졌다가 그 사랑이 차갑게 식기도 한다. 도약했다가 벽에 부딪힌다. 벅찬 성공을 맛봤다가도 실패에 기가 꺾인다.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라고 다를까? 그렇지 않다. 물론 그들이 겪는 부침은 스케일이 다르고 전체적으로 상향 곡선을 그린다.

하지만 슈퍼 스타들에게도 고충은 있다. 브룩스 켑카는 모교인 플로리다대학을 사랑하지만 골프 장학생으로 선발될 만큼 실력이 출중하지 못했다. 필 미컬슨은 서른세 살에야 메이저 대회의 관문을 통과했다. 조던 스피스는 단숨에 골프계를 정복했지만 이후 세계 랭킹 75위권 밖으로 밀려나기도 했다.

콜린 모리카와의 행보가 인상적인 건 그 때문이다. 굴곡이 없이 전체적으로 직선을 그리기 때문이다. 꺾인 부분을 찾아볼 수 없다. 그는 늘 순조로웠고 역경도 적었다. 캘리포니아 남부에서 어려움 없이 자랐고 주니어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낸 덕분에 대학을 골라서 갔다. 아마추어 랭킹 1위에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비즈니스 스쿨에서 학부를 마쳤다. 프로로 전향하고 두 달 만에 투어 카드를 손에 넣었다. 아름다운 여자 친구와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PGA투어 4승에 수백만 달러의 상금 그리고 메이저 챔피언십과 월드골프챔피언십(WGC) 우승까지, 이 모든 걸 스물다섯 번째 생일 이전에 이뤄냈다.

하지만 모리카와는 만족하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다. 겉으로는 어떻게 보일지 몰라도 자신에게는 아직 풀지 못한 문제가 있다고 말할 것이다.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정반대의 증거가 너무 많다.

●●● “나는 운이 좋았다”

데비와 블레인 모리카와는 전문 세탁소를 운영했는데 로스앤젤레스 도심의 여러 레스토랑에서 사용하는 테이블보와 냅킨 등을 도맡아 처리했다. 선대부터 운영해온 사업체였다. 엄청나게 많은 돈을 벌지는 않았어도 두 아들(콜린의 동생인 개릿은 올해 열일곱 살이며 골프보다 축구를 더 좋아한다)을 유복하게 키우기엔 부족하지 않았다.

그들이 살던 라카냐다플린트리지는 패서디나 북쪽에 있는 자그마한 부촌이다. 콜린은 지금 라스베이거스에서 혼자 살고 있다. 그는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니다. LA가 그립기는 하지만 세금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요즘 그는 좋은 의미에서 돈 걱정을 많이 한다. 돈이 많아진 탓이다. 어릴 때는 그렇지 않았다. “어릴 때도 돈 걱정을 해야 했던 적은 없었다. 저녁은 또 무엇으로 때워야 할지 걱정할 일은 없었다. 나는 많은 걸 갖고 싶어 하는 아이도 아니었다. 이것저것 사달라고 조르지 않았다. 그래도 뭔가 필요하거나 원하는 게 생겼을 땐 그런 것들을 해줄 여력이 있는 부모님이 계셨으니 운이 좋았다.” 그는 말했다.

그의 가족은 여행을 자주 다녔는데 주로 하와이에 갔다. 지금도 그곳에 친할아버지와 친할머니가 살고 계신다. 가족끼리 스키도 타러 다녔다. 글렌데일 인근에 있는 회원제 나인 홀 골프장인 체비체이스컨트리클럽에도 가입했다. 하지만 어린 콜린이 지닌 골프의 재능이 반짝이기 시작한 곳은 숄캐니언이라는 퍼블릭 코스였다. 3039야드의 파60인 이 코스에는 릭 세싱하우스라는 교습가가 있었다.

콜린이 다섯 살이었을 때 부모님은 아들을 받아달라고 숄의 주니어 골프 캠프 담당자를 설득했다. 규정상으로는 나이가 너무 어렸지만 그는 이미 일관되고 안정적인 스윙을 구사하고 있었다. 콜린은 말했다. “릭은 연습장 한쪽에서 상급반 골퍼를 지도했다. 저 사람한테 지도를 받고 싶다는 대상 같은 존재였다. 캠프가 끝나고 골프에 대한 관심이 서서히 깊어갈 때 부모님도 내 실력이 나아지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래서 릭을 찾아가 나를 맡아줄 수 있는지 물었고 여덟 살 무렵부터 관계가 쌓이기 시작했다.” 그 관계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릭은 프로 선수를 다수 데리고 있는 전형적인 스윙 코치와는 다르다. PGA투어에서 활동하는 제자는 모리카와가 유일하기 때문에 그는 응원하는 마음을 숨길 필요가 없다. 그러기는커녕 큰소리로 응원을 한다. 팬데믹으로 인해 관중이 없었던 2020년에는 그가 유일할 때도 많았다. “그가 버디를 하면 우리는 주먹을 마주쳤다.” 릭은 이렇게 말하며 환하게 웃었다. 여기서 우리란 그 순간에 가까이 있던 사람을 의미하며 필자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글을 했다면 당신의 손이 떨어져나갔을지도 모른다.” 그는 말했다.

물론 릭은 골프 스윙에 해박하다. 특히 15년 넘게 직접 다듬어온 콜린의 스윙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릭은 응용 스포츠심리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골프: 궁극의 심리 게임(Golf: The Ultimate Mind Game)>이라는 책도 썼다. 그런 그가 총괄적인 개선을 중시하고(그와 모리카와는 ‘성장형 사고방식’에 대해 자주 이야기한다) 아버지가 아들에 대해 자랑을 늘어놓듯 자신의 스타 제자와의 관계에 대해 말하는 건 놀랍지 않다.

그들은 좀처럼 연습 티에서 코치가 선수의 뒤에 서 있는 전형적인 풍경을 연출하지 않는다. 릭은 모리카와가 어릴 때에도 무작정 샷을 연습하게 하는 대신 골프 코스에서 실전처럼 플레이하는 쪽을 선호했다. “코스의 이곳저곳에 볼을 떨어뜨려 놓고 세 가지 버전으로 샷을 하게 했다.” 릭은 말했다. “처음에는 그에게 일임한다. 그런 다음 왜 그 샷을 선택했는지, 어떤 시도를 했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스스로 고칠 것을 바로잡아서 두 번째 샷을 한다. 마지막으로 내가 그 상황에 맞는 샷에 대해 기술적인 조언을 하면 세 번째로 그 샷을 시도하는 식이었다.”

릭의 목표는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다. 그는 콜린이 타격에 치중하는 타자가 아닌, 골프를 하는 플레이어가 되길 원한다. 다양한 변수를 고려하고 자신의 실수를 이해하길 원한다. 이건 스윙의 잘못이었을까, 판단의 잘못이었을까? 모리카와가 지금처럼 정교한 선수가 될 수 있었던 데는 그런 철학의 힘이 컸고 그건 코치와 선수가 모두 인정하는 점이다.

모리카와는 론치모니터의 화면을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일이 없다. 감각과 예술성, 운동신경을 거리만큼 중시한다. 릭과 모리카와의 연습은 그가 어릴 때부터 늘 한결같다. 기술에 크게 의존하지 않는 연습, 이를테면 발을 붙이고 하는 펀치 샷이나 피니시에서 손의 높이로 샷의 형태를 조정하는 것 같은 단순한 방법이다.

모리카와는 빠르게 발전했다. 열 살 무렵에는 다른 스포츠를 모두 포기했다. 야구를 그만두는 게 가장 힘들었다. 그는 말했다. “다른 스포츠를 하기 싫었던 건 아니다. 다만 이걸 하고 싶다면 이걸 해야 한다고 느꼈다. 생각해보면 기가 막히지만 나는 골프가 좋았다.” 그 어린 나이에 그런 걸 스스로 깨달았다니 놀랍다. 이후 몇 년 동안 대성할 재목을 맡았다는 릭의 믿음은 점점 굳건해졌다. “하루는 콜린을 지도하고 돌아와서 아내한테 이렇게 말한 기억이 난다. ‘그 아이에겐 재능이 있어. 특별한 재능이 있어. 그 애는 프로가 될 거야.’ 그때 콜린의 나이가 열두 살이었다.”

●●● 프로와 학업, 운명의 결정

대학에 진학할 때 모리카와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 뛰어난 주니어 선수에 학업 성적도 우수했던 터라 모든 대학 코치의 우선순위였다. “전국 어느 대학이든 내가 가고 싶은 데로 갈 수 있었다. 엄마가 USC를 나와서 나도 어릴 때부터 USC의 미식축구 팀을 응원했다. 팩-12 콘퍼런스에 해당하는 서부의 대학이 최고라고 생각하면서 자랐다.”

그는 결국 스탠퍼드와 UCLA, USC, 칼-버클리, 이렇게 캘리포니아의 네 개 대학으로 선택의 폭을 좁혔다. 그는 버클리를 최종 선택했고 단숨에 팀의 주축이 되었으며 신입생이던 2015~2016년에 참가한 14개 대회 가운데 7개 대회에서 팀의 최고 성적을 거뒀다. 하지만 그 시즌에는 단 한 번의 토너먼트에서도 우승하지 못했다. 그해 여름에야 미국 최고 선수들 가운데 한 명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2016년 6월에 그는 권위 있는 서니하나아마추어의 마지막 라운드에서 62타를 기록하며 우승을 차지했다. 그다음 주에는 지금의 콘페리투어에 속한 캐피탈클래식에 참가했는데 2015년 트랜스-미시시피아마추어 우승자에게 주어진 특전이었다. 그로서는 처음 참가한 프로 대회였기 때문에 컷 탈락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그런데 남은 두 라운드에서 63타를 기록한 데다 72번째 홀에서는 8m 거리에서 버디 퍼팅에 성공하며 세 명이 치르는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우승은 올리 슈나이더잰스에게 돌아갔지만 이제 모리카와에게는 어려운 결정이 남은 것처럼 보였다. 학교에 남을지, 프로로 전향할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실력 면에서 준비가 끝났다는 건 누가 봐도 분명했다. 하지만 그는 열아홉 살이었고 자신이 홀로 프로 골퍼의 삶을 살아갈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우승을 하더라도 프로로 전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말했다. “부모님과 상의하고 고민은 해봤을 것이다. 실력은 충분했을지 모르지만 프로의 삶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주변에서 나이에 비해 성숙하다는 얘기를 들어왔고 어쩌면 혼자서도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칼-버클리 같은 대학에 들어가놓고 1년 만에 좋은 성적을 거뒀다고 대학을 떠나고 싶지는 않았다.” 에릭 미나는 모리카와의 대학 시절에 마지막 3년을 지도한 조감독이었다. 모리카와가 2학년이 되었을 때 블랙호크컨트리클럽에서 함께 한 첫 번째 팀 연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에릭도 칼-버클리 시절에 전미 대표를 지냈고 몇 년 동안 미니투어에서 고전하다가 대학으로 돌아온 터였다.

그는 프로 골퍼가 감당해야 하는 삶의 실상을 잘 알고 있었다. “골프볼을 다루는 능력이 눈에 띄었다. 그는 볼을 제대로 컨트롤했다.” 에릭은 말했다. “하프 샷이건 풀 샷이건 자신의 야디지를 정확하게 알았다. 프로 골퍼도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은데 열아홉 살짜리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는 게 정말 놀라웠다.”

하지만 학교에 남는다고 해서 다 같은 게 아니다. 유망한 운동선수들이 뭐랄까, 적당한 전공을 선택해 적당히 수업을 듣는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타이거 우즈나 저스틴 토머스 그리고 조던 스피스처럼 중간에 대학을 그만두지 않는다면 학업이 부담으로 작용하지 않는 범위에서 학점을 수료하는 게 그들의 목표다.

모리카와는 달랐다. 골퍼로서 상승 곡선을 그리기 시작한 2학년 가을에 그는 미국의 3대학부 비즈니스 스쿨로 손꼽히는 하스 경영대학에 지원했다. 그리고 하와이에서 열린 골프토너먼트 중에 합격 통보를 받았다. “그를 학교에 묶어두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건 역시 하스 덕분인 것 같다. 만약 거기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중퇴할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에릭은 말했다.

프로 골퍼에게 경영학 학위가 무슨 소용일까? “하스를 나오면 많은 사람이 창업을 하거나 대기업에 들어간다.” 모리카와는 말했다. “좋은 일자리를 얻는다. 나도 좋은 일자리가 있고 골퍼로서 나만의 브랜드를 구축하고 있다. 내가 모든 걸 다 처리하지 않더라도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다 알고 있다.” 그는 말을 이었다. “PGA투어에서 활동하는 모든 선수가 자신의 등 뒤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그런 일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는다. 누군가가 대신 처리해주길 원한다. 하지만 나는 개입하는 게 좋다. 그런 것에 대해 알고 싶다.”

모리카와가 캐서린 주를 만난 것도 2학년 때였다. 캐서린은 페퍼다인대학 여자 골프팀 선수였다. 칼-버클리 여자팀의 선수가 다리를 놔주었는데 만난 방식이 아주 현대적이었다. 그 친구가 모리카와에게 캐서린의 인스타그램을 보여주었고 모리카와는 거기에 올라와 있는 사진을 보고 캐서린이 마음에 들었다. 두 사람은 문자를 주고받다가 봄방학 때 만났다. 그리고 그 후로 계속 사귀고 있다.

“캐서린이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 모리카와는 캐서린을 만나고서야 많은 토너먼트에서 우승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투어에 진출하면 대단히 외롭다. 그녀가 함께 있어준 덕분에 우리는 새로운 도시를 여행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다음 라운드의 스트레스에 짓눌리지 않은 채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가족이 있고 아이들을 동반하는 선수들이 최고의 실력을 발휘하는 데는 그렇게 스위치를 끌 수 있다는 것도 한몫을 하는 것 같다. 코스에서는 골프에 집중한다. 하지만 코스에서 내려온 후에는 자신을 몰아붙이지 않는다. 캐서린이 아니었다면 나도 24시간 내내 골프에만 집중하면서 다음 라운드 걱정에 안절부절못했을지 모른다. 그렇게는 살 수 없다.”

그는 경영대학에 들어갔고 여자 친구를 만났고, 우승을 하기 시작했다. 칼-버클리의 남은 3년 동안 그는 5승을 기록하고 플레이오프에서 두 차례 패했다. 3학년 때는 평균 68.68타로 NCAA 기록을 경신했고 미국 랭킹 1위에 올랐다. 4학년 때는 팩-12 개인전 타이틀을 획득했고 12개 대회에 나가 톱 10에 11번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대학 시절에 그가 거둔 가장 인상적인 업적, 단시간에 프로로 성공할 거라는 예상을 안겨준 순간은 토너먼트와 전혀 상관이 없다. 그건 연습장에서 나왔다. 대학 시절에 그는 론치모니터로 샷의 분포를 테스트했다. “6번 아이언 샷의 분포도가 투어 프로의 피칭 웨지 샷 평균치와 비슷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는 2019년에 골프다이제스트와 인터뷰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은근히 자랑하는 것이다.” (계속)

[글_대니얼 래퍼포트 / 정리_전민선 골프다이제스트 기자 jms@golfdiges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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