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열과 낭만의 쿠바 [Travel: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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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열과 낭만의 쿠바 [Travel:1504]
  • 김기찬
  • 승인 2015.04.07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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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열과 낭만의 쿠바 [Travel:1504]


미국과 쿠바의 관계는 뿌리 깊은 상처를 남긴 이혼을 겪은 두 사람의 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한때 아주 긴밀했던 우정에 대한 배신이 있었고 재산 싸움도 있었으며 악의에 차 서로 상처를 입히려는 일련의 시도(미국의 피그만 침공 사태, 미사일 위기, 마리엘난민송출사건 등)를 포함한 적대기도 있었다. 한때 사랑했던 둘은 이제 말하기를 거부하고 가끔 서로에게 침을 뱉고 으르렁거리며 길고 차디찬 침묵을 유지하는 데 합의한 상태다(이 글은 미국-쿠바 국교 정상화 이전에 쓰여졌다). 어쩌면 조금은 미친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골프가 결별 이후의 관계를 위한 카운슬러의 역할을 담당할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느낌을 가지고 있다. 두 나라는 결코 다시 밀월관계를 회복할 방도를 찾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언어적, 문화적, 정치적 차이를 뛰어넘는 즐거움인 골프는 최소한 이들 둘의 닫힌 입을 열어 서로 대화를 시작하게 만드는 상태까지 끌어올릴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만일 쿠바가 많은 미국인들이 찾는 골프여행지가 된다면 진지한 대화의 장이 다시 열리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예전의 모든 허물은 용서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동유럽에서 그랬듯이 마침내 독재정권이 무너지는 일이 일어날지도 모를 일이다. 만일 당신이 쿠바에서 골프를 하고 싶다면 갈 곳은 사실 쿠바에서 유일한 18홀 코스인 바라데로이다. 하바나에서 자동차로 동쪽으로 2시간 거리에 위치하며 카리브해를 향해 손가락 모양으로 삐죽 튀어나온 지역이다. 뛰어난 해변의 풍광과 달콤한 공기를 갖고 있는 바라데로는 한때 알 카포네, 풀헨시오 바티스타와 같은 범죄자나 독 재자의 본거지로 사설경찰들이 경비를 서던 곳이며 최고급 콜걸들에게 인기 있던 곳이었다. 오늘날, 특히 겨울철에는 얼음천지가 되는 고국을 떠나 햇빛이 풍부한 최고급 호텔과 아름다운 해변을 즐기려는 한 떼의 캐나다인들로 붐비는데 이들 중 많은 이들은 이 지역에 하나밖에 없는 18홀 코스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어하는 골퍼들이다. 미국인인 나는 최근 북쪽에서 온 캐나다 여행가들 틈에 끼어 이 섬나라에 슬쩍 스며들어가 이곳의 골프 환경을 살펴보기로 했다. 내가 ‘슬쩍 스며든다’고 한 것은 대부분의 미국인들에게 있어 쿠바여행이 사실은 불법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기자신분을 이용해 취재를 위한 공식 방문 신청을 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관광청에서 나온 공산당원이 줄곧 나를 따라다니며 혁명 박물관, 체 게바라가 유명한 연설을 한 곳 같이 카스트로의 추종자들이 보여주기를 원하는 곳으로 날 안내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 그러려면 칸쿤이나 바하마를 경유하는 것보다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직항을 이용하는 편이 훨씬 낫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경미한 편집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몇 년 전 피델 카스트로 암살 계획과 관련된 소설을 출간했고, 때문에 목에 ‘<피델의 최후>라는 소설을 쓴 미국 작가’라는 명패를 달고 입국하는 사태는 피하고 싶었다. 클럽을 싸들고 5시간동안 차를 타고 몬트리올로 간 다음 패키지 여행상품 하나를 신청하고 4시간의 비행을 감내한 뒤 바라데로의 신공항에 내렸을 때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다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었다. 입국심사대에서 호세라는 이름의 친근한 인상의 사내가 내 서류를 들여다본 다음 미심쩍은 표정으로 내 여권을 톡톡 치며 ‘미국인이 바라데로에 왜 왔는지 궁금하다’고 중얼거렸을 때 나는 이 골프 잡지의 편집자가 내게 보낸 의뢰서를 그에게 보여주었는데 이것이 미스였다. 호세는 한참이나 이 편지를 내려다보더니 입을 꾹 다물고는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 저었다. “작가에다 미국인이구요, 메룰로씨?” “예.” “그럼 안 좋은데.” “안 좋다고요?” 다시 고개를 가로 젓는다. “저쪽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에게 가셔야겠어요.” 나는 반쯤은 손에 수갑을 든 녹색복장의 남자들을 예상하며 시선을 돌렸는데 테이블에는 매력적인 여성 두 명만이 앉아 있었다(명심할 것은 ‘매력적인’이나 혹은 이보다 더 강한 표현은 쿠바에 있는 모든 여성의 90퍼센트에 적용될 수 있는 형용사들이다. 내 여성 친구들 역시 쿠바 남성들에 대해 똑같은 반응을 보일 것이라 생각한다. 쿠바사람들도 다양한 체격과 외모를 지니고 있지만 지구상에서 가장 잘생긴 사람들이다). 테이블에서는 복잡한 대화가 오갔다. 두 여성 중 한 명은 유창한 영어를 구사했고, 한 명은 아니었다. 내 스페인어는 스와힐리어 수준과 그리 다를 바 없었지만 내 여권을 든 두 번째 여성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말을 하는 것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것 봐. 이 사람 러시아에도 갔었어. 그 작가야.” 옆에 있던 여성이 내게 ‘비자가 유효하지 않다’고 말을했을 때 내가 물었다. “그럼 못 들어가는 겁니까?”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바라데로의 이민성에 가서 새 비자를 발급받으셔야 할 겁니다. 당신은 사업차 출장을 온 것이니 비즈니스 비자가 있어야 하는 겁니다. 그게 다예요.” 다시 호세에게 돌아가자 그는 친절하게 ‘편한 시간을 보내라’고 빌어 주었다. 베라데로에서 묵었던 호텔의 이름은 멜리아라스아메리카스였는데 이곳에 있는 바에서는 하루 종일 무료 음료가 제공되고 킬힐을 신은 여자가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으며 어디서든 캐나다식 프랑스어를 하는 백인들을 볼 수 있었다. 파도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유일한 18홀 코스 바라데로 내 운전수 이반은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훌륭하게 관리된 디트로이트 시절의 다양한 명차들을 가리켰고 잠시 동안 내 어린 시절을 회상하도록 만들어주었다. “55년형 쉐비. 캐디-이-일락, 52년형이지요.” 몇몇 차는 문짝에 ‘환상적인 차를 렌트하세요’라는 글이 페인트칠이 되어 있었고, CD플레이어까지 갖추고 있었다. 이들 차들은 허 름한 쇼 룸에 나온 옛 소련의 라다 자동차를 선보이는 박물관 디스플레이처럼 2차선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길에는 대형 투어 버스들도 있었고, 농장의 트럭들이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달렸다. 급수탑에는 러시아어로 ‘환영합니다(Dobro Pozhalovat)’라는 시릴어가 바래져가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제 확실한 관광객 신분을 갖춘 나는 코스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코스는 대단히 훌륭한 코스였다. 쿠바 혁명이 일어나기 전 이곳은 유명한 집안인 이레네 듀퐁의 소유였다. 그가 이곳에 짓고 제너두라 이름 지은 맨션은 클럽하우스 바로 옆에 서서 벽옥색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곳에 오면 6개의 게스트 룸 중 하나를 렌트해 3층의 베란다에 나가 라운드 후의 시가를 즐기거나 어두운 색의 패널로 호화스럽게 장식된 다이닝 룸에서 ‘듀퐁 스타일 랍스터’를 위시한 다양한 메뉴를 골라 맛볼 수 있다. 혹은 내가 그랬던 것처럼 제너두에서 재빨리 기념 사진을 찍은 다음 옆으로 가서 골프를 즐길 수도 있을 것이다. 꽃잎 모양으로 들고 나는 바닷물 때문에 여기저기 삐죽 튀어 나온 해안을 따라 펼쳐진 6856야드의 코스에서 플레이하다 보면 바라데로GC는 마이애미 도랄의 블루몬스터 코스를 떠올리게 했다.

티 샷 한 볼이 떨어질 랜딩 에리어가 넓게 펼쳐지고 깊은 벙커에 둘러싸인 편평한 그린, 페어웨이를 따라 늘어선 야자수, 맹그로브와 알마시고 나무들, 땅을 이리저리 걸어 다니는 따오기와 호로새, 머리 위의 펠리컨, 그리고 잽싼 몸짓으로 산호 동굴로 숨어들어가는 쿠바의 컬리테일 도마뱀까지. 타이트하면서도 느리다는 느낌이 들 수 있는 적절한 빠르기의 그린을 지닌 첫  12개 홀도 충분히 훌륭하다.

하지만 나머지 6개 홀은 진정 놀라울 지경이다. 13번 홀은 머리 높이로 돌출된 산호를 넘겨 구부러지고 층이 져 있으며 왼쪽으로는 벼랑이 있는 고원을 향해 티 샷을 해야 한다. 14번 홀은 도그레그 홀로 날카로운 코너의 위험을 감수하면 그만한 보상이 뒤따른다.  15번 홀은 물을 넘겨서 치는 긴 거리의 세컨드 샷을 요구한다.  16번 홀은 물을 두 번 넘겨야 하는 파5 홀로 롱 아이언, 웨지, 웨지의 안전한 플레이를 하거나 위험을 무릅쓴 세컨드 샷을 시도해 볼 수 있는 곳이다. 17번 홀은 200야드의 파3 홀로 높이 올라 앉아 좌우에 벙커를 거느린 그린을 향해 샷을 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 18번 홀은 카리브해를 왼쪽에 두고 높은 티에서 벙커가 도사린 저지대의 랜딩 에리어로 볼을 보낸 다음, 경사진 그린을 향해 볼을 올려쳐야 한다. 다시 말해 상상도 못해본 곳에서 만난 진정한 골프라고나 할까? 바라데로에서의 골프는 ‘처비’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55세의 사근사근한 남성 페드로 클라인에 의해 관리되었다. 처비는 친절하게도 클럽하우스 2층 파티오의 바에서  1시간 동안이나 내 옆을 지켜주었는데, 18번 홀 그린과 너무나 가까워서 사람들이 퍼트를 할 때에는 목소리를 낮춰야만 했다. 대학에서 언어학을 전공한 그는 아주 훌륭한 영어로 내게 ‘독일어 강사를 하고 싶었다’고 털어 놓았다. 하지만 바라데로에서 2년을 보냈을 때 독일어 교사 수요가 없어졌고 그의 어휘 구사력과 외국인들을 편하게 대하는 그의 자질을 잘 알고 있던 정부는 페드로에게 이곳에 새롭게 시작하는 골프 비즈니스를 맡겼다. 하지만 당시 처비는 클럽을 잡아 본 적도 없었다. 그는 쿠바 프로 호세 (페페) 페르난데스에게 2주간의 집중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하바나로 보내졌다. 장비, 룰, 스윙 이론, 토너먼트 조직 등 골프의 기본에 대해 배운 다음 바라데로로 돌아와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골프 산업을 만들어 갔다. “나는 곧 이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나는 볼과 클럽을 샀고 토너먼트와 모든 것들을 준비했지요.” 얼마 후 열정적인 로비 끝에 처비는 바라데로 골프에 대규모 재정지원을 얻어냈다. 그때는 마침 1990년대로 소련의 지원이 끊겨가고 있었고 카스트로조차 ‘타락한 스포츠인 골프가 결국은 관광객의 돈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인정하 기에 이르렀던 것이 분명하다. 그는 캐나다 출신 설계가이자 트렌트 존스와 함께 일했던 르 푸베르를 고용해 듀퐁의 낡은 9홀 코스를  18홀로 확장하도록 했다. 처비는 1999년과 2000년 두 차례에 걸쳐 유러피언 챌린지투어의 그랜드 파이널 대회를 바라데로에 유치했고(페덱스컵 챔피언인 헨릭 스탠손이 2000년에 우승했다) 이곳은 최소한 캐나다인들에게는 꿈의 골프 관광지가 되었다. 2008년에는 골프장 사업이 최고조에 이르러 한 해 3만5000라운드라는 기록을 세웠으며 이는 지금까지 깨지지 않고 있다. 요즘 처비는 쿠바인 골퍼 몇몇을 관리하고 있는데 이들 대부분은 인근 관광호텔의 종업원들이며 몇몇은 스크래치 골퍼다. 그러나 라운드 당 77달러의 그린피에 카트 사용료 33달러가 추가되는 바라데로는 월평균 임금이 약 20달러 수준에 불과한 이곳 클라인의 이웃 대부분에게 있어서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곳으로 남아 있다. 바라데로 를 찾는 고객 거의 대부분은 관광호텔에서 오는 사람들이다. 힘든 일이기는 하지만 처비는 관광객들을 상대하는 일을 좋아한다. 그는 완벽한 독일어, 훌륭한 수준의 영어와 어느 정도의 프랑스어를 구사하고 쿠바의 어려운 경제 사정을 감안해서 외화가 어느 정도의 가치를 지니는지 잘 이해한다. “만일 상황(미국의 경제봉쇄)이 변하면 쿠바에 새로운 코스들이 들어서게 될 겁니다”라는 그는 손가락을 튕긴다. “이렇게요. 수백만 명의 미국인들이 이곳에 올 겁니다. 주말 여행지가 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처비는 쿠바 정부가 합작투자를 받는 것을 고집하고 있다고 털어놓는다. 하지만 투자자들은 당연하게도 이런 질문을 할 것이다. ‘몇 년 뒤에 코스가 국유화가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을 받을 수 있는가?’ “나는 투자 의지를 가진 외국인 투자자들을 정말 많이 만났습니다. 쿠바 골프의 미래도 그만큼 더 가까워진 것이지요.”

보석 같은 하바나 구시가지 바라데로에서 또 한 번의 라운드를 한 다음 뷔페에서 배를 채운 나는 바라데로를 빼면 쿠바에 하나밖에 남지 않는 하바나GC에서 플레이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바라데로와 수도 하바나를 잇는 4차선 고속도로는 잘 관리되고 있었고 이 도로가 가로지르는 땅은 대부분 편평하고 대단히 건조했다. 적어도 3월 말에는 말이다. 오른쪽으로는 바다가 펼쳐져 있는데 바라데로의 해변 백사장은 어느새 울퉁불퉁한 산호 해안으로 바뀌었고 가끔 석유시추를 위한 기중기가 멀리 보였다. 단단해 보이는 벽 돌 블록과 석회를 바른 집들은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몇몇 아파트들은 마치 지독한 향수병을 보드카로 잊고자 했던 소련 건설인부들이 모여 살던 것처럼 보였다. 길 양 편에 눈길이 닿는 곳마다 통근버스를 기다리거나, 하바나 블루스를 연주하거나, 식료품으로 불룩해진 비닐봉투를 들고 달러 지폐를 쥔 손을 흔들며 지나가는 쉐비를 세우려고 애쓰거나, 혹은 나른한 라틴 열정을 안고 아침 햇살을 즐기러 나온 사람들이 있었다. 공기는 건조하고 따뜻했고 햇살은 감미로운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 었지만 멜리아라스아메리카스의 화려함은 진입로 끝에 이르자마자 막스-레닌식 실용주의 미학과 카리브해의 단순함이 뒤섞인 쿠바식 빈곤으로 대체되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하바나 구시가지가 이곳의 보석이라 생각한다.

낡을 대로 낡았고 헝클어져 있으며 요란하고 거친 데다 말도 안 되게 슬픈 보석. 나는 부두의 커다랗고 창문이 없는 호텔로 방을 옮긴 즉시 길을 나서 두터운 나무문과 연철 레일이 깔린 발코니, 정교한 외관에 조각으로 추녀 밑을 장식한 스페인 식민 시절 건물들이 늘어선 블록을 따라 걸었다. 이 귀한 건축물들은 더 번영했던 시대의 기 념물처럼 서 있었지만 98퍼센트에 달하는 건물들은 보수가 안 되어 거의 무너질 지경에 이르렀다. 파스텔 페인트는 부분 부분 바랬고 석회는 벗겨지거나 아예 통째로 사라졌으며 레일은 녹이 슬고 나무 문짝은 금이 가 있고 보도와 포장도로는 지뢰밭처럼 곳곳이 움푹 패여 자갈과 개똥, 그리고 콘돔 포장지부터 음료수 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쓰레기를 드러내고 있었다. 관광객들은 250년 된 성당 앞에 있는 것과 같은 오래된 식민 시대 광장을 가득 메웠고 잡상인들은 성가시게 달라붙어 택시, 시가, 티셔츠 등을 추천해댔다. 하지만 관광객들은 거의 언제나 “노, 그라시아스”라는 간단한 대꾸와 함께 미소를 보이며 거절했다. 하바나에서 내가 느낀 이상한 점은 바로 이것이다. 특히 관광객들이 모이는 곳 바깥의 길은 때때로 전기 테이프로 붙인 방망이와 볼을 가지고 노는 한 떼의 아이들, 휠체어를 탄 다리 없는 남자들, 계단에 앉은 커플들, 셋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는 젊은 보디빌더들로 시끄럽기 그지없지만 그 어디에도 위험한 기미는 없다. 한 눈에도 알아볼 수 있는 빈곤함과 몇 가지 자유의 결여에도 불구하고 쿠바인들은 행복한 품위(나는 비폭력적이라 말하고 싶다)를 유지하고 있다. 나는 한 여자가 노래를 부르며 자신의 허름한 집 앞 보도를 쓰는 것을 보았다. 나는 늙은 남자가 플라스틱 병으로 가득한 우유 박스를 등에 맨 채 자전거를 타고 가는 것을 보았다. 그 역시 노래를 하고 있었다. 하루에 13킬러미터씩 걷던 어느 날 나는 품위 있는 관광객이라면 절대 들어가지 않을 바에 들어가 바걸 옆에 앉아 끔찍한 세르베자(Cerveza) 맥주를 마시며 그 여자에게는 과하게 비싼 모히토(쿠바 아바나가 발상지인 럼 기반 칵테일)를 사주었다. 그녀는 자기 아이들에 관해 이야기를 한 다음 내게 다양한 외설스러운 제안을 했고 나는 그 모두를 거절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덜 저속하고 더 인간적인 방법으로 말이다. 다른 손님 중 한 명이 내게 소리를 질렀고, 내가 맞고함을 치자 그는 다가와서 내 손을 잡고 흔들며 “수에르테 에스타도스 우디도스(미국에 행운을)!”이라고 말했다. 여자는 내게 ‘그가 뗏목을 타고 자유를 찾아가려다 체포되어 옥에 갇힌 적이 있으며 그저 내게 인사를 하고 미국에 관해 좋은 말을 하고 싶어한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나는 가난에 관해 얼버무리고 싶은 생각은 없다. 어느 순간 목에 동전 크기만 한 구멍이 난 남자가 손을 뻗은 채 내게 다가왔다. 건너편 보도에서는 한 노인이 쓰레기통을 뒤지며 음식을 찾고 있는 것을 보았다. 웨이트리스가 이부로펜 한 병을 마치 사파이어 귀걸이 한 쌍인 양 받았다. 열린 문틈으로 슬쩍 들여다 본 아파트는 작고 어수선했고, 여름에는 찌는 듯이 더울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3일 밤낮을 걸어다니는 동안 나는 단 한 번도 누군가가 화가 나서 고함을 지르거나 몸싸움 비슷한 것이라도 본 적이 없었다. 라울 카스트로가 최근 허용해 준 개인 소유의 레스토랑 중 하나인 라갈레가의 주방장은 내가 쿠바에서 맛본 최고의 식사(쌀과 콩, 감자와 양배추 샐러드를 곁들인 붉은 도미 통구이)를 내오기 전 내게 “이 제 이곳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입니다. 우리는 총도 없고 마약도 거의 찾을 수 없지요. 사람들은 가난하지만 우리는 웃습니다. 그밖에 우리가 뭘 할 수 있겠어요?”라고 말했다. 식사를 마친 나는 하바나의 길을 날아다니는 불법 택시(여행 안내원이 관광객들에게 피하라고 경고하는) 한 대를 잡아탔다. 5단 기어에 17세기 포장마차에나 달았을 서스펜션을 장착한 크림-체리색의 55년형 쉐비 벨에어였다. 이 우아한 자동차의 운전사는 정직하고 친절한 먼치에라는 이름의 사내였는데 자기 아내를 그와 나 사이에 앉히고 CD로 이글스의 노래 ‘호텔 캘리포니아’를 틀어댔다. ‘(중략) 어느 때고 원할 때 체크아웃 할 수는 있지만 절대 떠날 수 없어요.‘

 

혁명 전에 조성된 하바나GC 택시를 타고 덜컹거리며 하바나를 벗어났다. 미적 감각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거대한 아파트단지로 이루어진 황량한 막시스트 지대를 지나서 말이다. 뒤에 어린이용 좌석을 달고 말 그림을 그려 넣은 마차가 딸깍거리며 길을 달린다. 길가의 사람들이 바나나 뭉치를 팔며 키스를 날리는 뒤편의 빌보드에는 만면에 웃음을 띤 체 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의 얼굴 그림과 함께 ‘우리는 사회주의를 보호하고 완성하기 위해 일한다!’는 슬로건이 ‘사회주의가 아니면 죽음을(Socialismo O Muerte)!’이라는 표어와 함께 붙어 있다. 하바나로 가기 전 나는 그곳의 골프코스가 ‘손상됐다’고 들었다. 나는 이조차 과도하게 후한 평가인 것 같다고 생각한다. 만일 바라데로가 진짜 쿠바가 아니라면(그리고 실제로 아니지만) 혁명이 일어나기 전 영국 외교관에 의해 건설된 9홀의 2946야드 하바나GC도 더 이상 진짜 골프코스라 할 수 없다. 그렇다. 구릉진 평원을 가로질러 펼쳐진 꽤 괜찮은 레이아웃이 있다. 그리고 맞다. 핀 대신 나뭇가지가 꽂혀있고 고무래가 없는 벙커를 갖춰 구분이 가능한 그린도 있다. 그리고 또 맞다. 내 골프백을 들어준 친절하고 능숙한 아마도 같은 캐디를 고용할 수 있다. 또 바에 걸린 현수막이 고객들을 향해 ‘당신은 당신이 원하는 바를 얻을 권 리가 있습니다’라고 선언하는 옆과 어니 엘스의 사진 밑에서 한 잔 할 수 있다. 하지만 잔디는 잡초의 일종인 바랭이풀이다. 진심으로 하는 말인데 진흙 위에서 플레이할 때 라이가 더 좋았을 것이다.

그리고 흙 위에서 플레이하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상황이 너무도 안 좋게 흘러가서 스스로 핸디캡이 30이라고 주장하는 아마도가 첫 홀부터 내게 조언을 해대기 시작했다. “손님은 어깨를 사용해서 이렇게 하셔야 할 겁니다. 손님은 이런 식으로~.” 그는 임팩트 때 뻣뻣하게 뻗은 팔을 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를 좋아했고 그의 조언은 무시했으며 뜨거운 태양 아래 내 방식을 고수해 훨씬 더 까다로운 바라데로의 전반 9홀보다  10타나 더 많이 쳤다. 어느 순간 주름이 쪼글쪼글 한 노인 한 명이 (정글에서 나무를 베는데 쓰는 칼인)마체테를 들고 골프는 어떻게 하는 것인지 보고 배우려는 듯, 혹은 동정심을 표하고 싶은데 뭔가 적절한 말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듯 나를 두 홀이나 따라 왔다. 어쩌면 그는 이 땅에 샘 스니드, 로이드 맹그럼, 지미 드마레, 클로드하먼 같은 골퍼들이 미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건너올 만큼 훌륭한 코스들이  10여 곳이나 있었던 혁명 이전의 골프를 기억할지도 모른다

밥 토스키는  1953년  12월 도널드 로스가 디자인한 하바나의 골프장에서 열린 하바나인비테이셔널의 마지막 홀에서 버디를 낚으며 우승했다. 그는  1500달러의 상금을 받아 이듬해 상금 랭킹  1위에 오르는 성공을 거둘 조짐을 나타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토스키는나와의 전화 통화에서 “쿠바에 대해 좋은 기억들을 가지고 있다”고털어놓았다. “사람들은 정말 환상적이었지요. 그들은 프로를 신처럼 떠받들어 주었습니다. 나는 스페인어가 서툴렀는데 그들은 우리가 얼마나 플레이를 잘 했는지, 얼마나 술을 많이 마셨는지, 그리고우리가 얼마나 잘 웃는지, 또 얼마나 많은 이야깃거리를 가지고 있는지에 관해 많은 관심을 보여주었지요.” 토스키는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 옛 코스들이 있던 곳을 안내받을 수 있을지 알고 싶어했지만훌륭한 음식과 음악, 그리고 우아한 클럽하우스를 갖춘 화려했던 하바나의 옛 골프장과 지금 하바나에 남아 있는 골프 사이에는 정말길고도 험한 길이 놓여 있을 따름이다. 내가 샷을 하기 위해 볼 앞에 설 때면 아마도는 “자, 이제 집중하세요, 집중”이라고 말했고 어찌어찌 해서 정확한 샷을 날리면 “그렇지요. 플레이할 줄 아시네요. 손님은 선수예요. 전 알고 있었다고요!” 라고 말하곤 했다. 그는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고 이제 이곳에서 일하고 있었다. 짐작컨대 이 카스트로의 사회주의 천국에서는 캐디가 경제학자보다 돈을 더 많이 벌기 때문일 것이다. 처비 클라인처럼 하바나GC의 책임자인 마를레네는 언어학을 공부했다. 그녀는 유창한 영어로 ‘자신의 일을 좋아하고 골프를 좋아하며 쿠바의 모든 것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런 말들은 내게 ‘이제는 쿠바에 한창 준비 중인 골프코스들이 있다’고 말해준 사람들처럼 그저 그들에게 그럴 듯하게 들릴 뿐이다. 물론 나는 카마구에이시에 골프장이 계획 중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혹은 키스제도 중 하나이거나. 물론 정부는 몇 개의 새 코스들이 건설될 것이라고 말한다. 서류로도 만들어졌다는 말도 들었다.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은? 물론 있을 것이다. 언제? 곧, 조만간에. 나는 사람들이 이런 프로그램을 계획 중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소련에서 일할 때의 경험을 통해 이런 접근방식을 잘 알고 있다. 비록 새 시스템이 러시아와 쿠바에서 혁명이 일어나기 전 시작된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이 끔찍한 불공평함을 이해하지만 이번 여행을 통해 거짓말과 정치 선동, 그리고 정부가 가끔 들러 닦아주어야만 하는 희망이라는 부실한 버팀목에 의해 지지되지 않으면 공산 주의라는 것은 성립될 수 없음을 더욱 분명하게 알게 된 듯하다. 내가 목격한 것은 슬픈 풍경이었고 나는 우울한 심정으로 올드 하바나로 돌아왔다.

그럼에도 쿠바는 매력적이다 무엇보다도 가장 슬펐던 점은 내가 묵었던 호텔 옆에 서 있던 번쩍이는 러시아 정교회 건물이었을지도 모른다. 눈부시게 닦인 석회벽과 깔끔한 철제 게이트만 보아도 이곳은 하바나에서 가장 잘 지어진 건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해주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매월 10달러의 봉급을 받고 이곳에서 일하는 관리인은 러시아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으로 ‘이제는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없다’고 말해주었다. 아무도,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다. 교회 건물은 사용되고 있지 않았다. “사람들은 저 문을 통해 걸어 들어와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는 왜 의자가 없느냐고 물어요. 그리고는 다시 걸어 나갑니다. 이 건물은 러시아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의미에서 지어진 겁니다.”

‘러시아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거라고!’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2004년, 러시아 사람들이 그들의 돈주머니와 군인들, 그리고 건설인부들까지 몽땅 긁어모아 이 땅을 떠난 지 10년도 더 지난 2004년에 말이다! 모르긴 몰라도 수십만 페소와 많은 인력이 오랜 시간동안 투입되었을 것이다. 그리고는 쓸쓸한 슬라브식 공허함 속에 우뚝 서서 길 건너편에서 무너져가는 세관건물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세관의 여성직원들은 미니스커트와 망사스타킹으로 치장하고 있고 젊은 남성들은 도로 경계석에 앉아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으며 경찰(한 택시 운전사는 그들을 보고 ‘우리의 마피아’라고 불렀다)들은 곤봉을 돌리며 지나가는 차들에 눈길을 주고 있고 카스트로의 정책과 미국의 영토봉쇄의 고약한 콤비 덕분에 아픈 아이들은 필요한 약을 처방받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와중에 말이다. 나는 쿠바가 좋았고 쿠바사람들의 품위와 고상함이 좋았으며 길거리에서 들려오는 음악, 시가, 럼주, 그리고 헤밍웨이가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집필하기 시작했던 앰보스 문도스 호텔의 꼭대기층 파티오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경도 좋았다. 카트를 모는 아가씨가 나를 안아주며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길!”이라고 말해 주었던 바라데로의  18번 홀 퍼팅 그린도 좋았고 매력이 넘치는 쿠바 여성들, 온화한 공기도 좋았다. 하지만 이 섬나라를 떠나 집으로 향하는 나는 두 나라의 오만과 고집이 골프로도 녹일 수 없는 결별 후의 적대감을 이루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을 떨칠 수 없었다. 만일 봉쇄령이 풀리고, 문호가 갑작스럽게 열린다면, 새로운 골프코스들이 갑작스럽게 건설된다면, 관광객들의 주머니에서부터 나온 돈이 내가 점심식사를 했던 올 드 하바나의 어느 레스토랑에서 만난 근면하고 야심찬 젊은 아가씨와 같은 평범한 쿠바사람들에게까지 흘러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만난 어느 누구도 이 같은 미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한 여성은 내가 황새치 필레 요리를 먹는 동안 내 옆에 앉아 열린 창문 너머로 보이는 길가 풍경을 가리켰다. 찻길 반대편의 아름다운 오래된 출입구 위에 발코니가 나와 있었지만 문은 부서져 있고 석회를 바른 벽은 갈라졌으며 색이 바래 있었다. 그녀는 행복하게, 거의 자랑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게 바로 쿠바랍니다.”

 

골프의 신천지, 카리브해 두 나라 지난해 말 미국과 쿠바가 국교 정상화를 선언하면서 쿠바로의 골프 여행이 보다 늘어날 전망이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라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이 지난해  12월17일  53년 만의 교류를 선언한 데 이어, 미국은 지난  1월16일부터 쿠바와의 무역 및 금융거래 제한을 대폭 완화하고 여행 자유화를 허용했다. 이에 따라 뉴욕-하바나 직항 비행편도  3월부터 매주  1회 운항을 시작했다.

연  5000명으로 추산되는 한국인 여행객들은 종전까지는 캐나다를 통해서만 입국했지만 이제는 미국을 경유해 오갈 수 있게 되었다. 국교정상화로 인해 미국계 은행의 신용카드 사용도 가능해졌다. 골프장과 리조트 문의도 급증하는 중이다. 종전까지는 무역 제재로 전산장비 수입이 제한돼 결제가 어려웠고 내국인과 외국인이 쓰는 화폐가 서로 달랐으며 환전조차 쉽지 않았다. 미국이 쿠바와 외교 관계를 단절한 것은  1959년  1월 피델 카스트로가 혁명을 통해 공산당 정부를 수립한 지  2년 만인  1961년  1월이었다. 카리브해에 속한 쿠바와 이웃 나라 도미니카공화국의 골프를 함께 소개한다.

에디터_남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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