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미키 라이트! [Feature :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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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미키 라이트! [Feature : 1711]
  • 김기찬
  • 승인 2017.11.23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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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미키 라이트! [Feature : 1711]


진정한 골프 천재와 나눈 매력적인 대화.

열세 번의 메이저 대회 우승을 포함해 LPGA투어에서 무려 82승을 거둔 미키 라이트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여성 골퍼라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미적으로나 기술적으로도 기적에 가까운 그의 스윙을 벤 호건은 자신이 본 최고의 스윙이라고 평했다. 서른네 살이던 1969년에는 거의 신화적인 위치에 올랐다. 그러다가 등장했을 때처럼 홀연히 사라졌다. 그는 이유를 밝히지 않은 채 은퇴를 선언하고 1973년까지 산발적으로 대회에 참가하다가 그 후로는 플로리다의 집에서 개인적인 삶을 살았다. 그 후로도 이따금 대외적인 발언을 하기는 했지만 이야기를 길게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어떤 골퍼도, 심지어 호건마저도, 우리로 하여금 골퍼의 생각과 경험이 녹아 있는 통찰력을 이토록 궁금하게 만든 적은 없었다. 그리고 이번에 그는 우리를 맞아주었다. 미키는 정확한 기록을 자연스럽게 언급했고 그의 목소리는 힘이 있었으며 흐트러짐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평가는 너그럽고 자신에 대한 평가는 겸손했다. 그는 강력하게 골프를 옹호했고, 놀라운 일도 아니지만, 전통주의자였다. 그를 만나는 건 기쁨이었다. 111번째 마이 샷을 맞아 세상에 둘도 없는, 그리고 역사상 최고인 미키 라이트를 여러분께 소개할 수 있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

여든두 살치고는 몸을 잘 관리하고 있다. 올 초에 수술을 두 번 받았다는 얘기를 떠들어댈 생각은 없다. 순조롭게 회복하는 중이다. 실제로 상태가 아주 좋아서 어제는 뒷마당에 나가 우리 집에 있는 코스의 페어웨이를 향해 웨지 샷을 다섯 번 했다. 그리고는 언제나처럼 나가서 볼을 주워왔다. 대수롭지 않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플로리다의 여름은 장난이 아니다. 당신이 알고 있는 여든두 살 할머니 중에 35도의 날씨에 나가서 플레이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나?

나는 지금도 스윙하는 게 제일 좋다. 1995년에 마지막으로 대회에 참가한 후에도 나는 뒷마당에서 샷을 했다. 2011년에 USGA 박물관이 미키 라이트 전시실을 꾸미면서 전시할 물건이 조금 필요하다고 했을 때 나는 수많은 것 중에서 인조 잔디 조각을 보냈다. 마지막으로 한번 그 위에서 샷을 하고는 이게 제격이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인디애나에 사는 몇몇 친구들이 그 얘기를 듣고 새 연습 매트를 보내줬다. 그게 어떤가 하면, 매트를 깔고 볼을 몇 개 올려놓은 후 클럽을 쥐고 서면 그 앞을 떠나고 싶지 않아진다. 그래서 나는 그 점을 유념하고 한 번에 대여섯 개의 볼을 친다. 그 정도면 ‘골퍼’로 남을 만하다. 얼마 전에는 윌슨에서 고맙게도 새 아이언 세트를 보내줬다. 새 세트를 보는 건 오랜만이었는데 정말 충격적이었다. 요즘 나오는 샤프트는 훨씬 더 길고 로프트는 내가 익숙했던 것보다 훨씬 더 낮다. 나는 그걸 다루기 힘들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걸로 스윙하려니 거의 다른 게임을 하는 느낌이었다. 더 쉬워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서 최소한 20년도 더 된 윌슨 팻 샤프트가 장착된 낡은 갭 웨지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비거리는 100야드, 어쩌면 110야드 정도다. 예전과 사실상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도 나는 꾸준히 뭔가를 연마한다. 주로 셋업, 볼의 위치, 체중의 배치 같은 기본적인 것들이다. 볼과의 거리, 테이크어웨이의 첫 동작. 살면서 뭔가를 연마하지 않았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내게는 그게 가장 중요한 점이었다. 문제를 파악하고 그걸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것이 기쁨의 원천이다. 내년에는 그 뭔가를 지금보다 더 잘하게 될 공산이 크다.

끊임없이 들려오는 새로운 스윙 아이디어, TV 속에서 선수들이 구사하는 그런 스윙을 시도해본 적이 있다. 솔직히 말해서 냉랭한 마음이 들었다. 선수들을 보면 발을 지면에 붙인 채로 유지하고, 등을 완전히 곧게 펴고 하체를 거의 움직이지 않는데, 그럴 경우 부상의 위험이 있다는 걸 자신들도 알고 있다. 그들은 ‘지렛대 효과’가 지나쳐 보이는데 정확한 표현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런 각도를 보면 그 말이 떠오른다. 나는 스윙이 지면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배웠는데 그것과 정반대다. 아무래도 내가 현대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의료용 테이프를 붙인 선수들이 너무 많이 눈에 띈다는 것이다. 손, 팔, 다리, 등, 모든 곳에 붙이고 있다. 좋은 징조일 수가 없다.

선수 생활을 하는 동안 골프와 관련된 부상은 한 번뿐이었다. 왼쪽 손목의 신경절 낭종이었다. 발목은 두 번 접질렸다. 두 번 모두 하이힐을 신고 칵테일파티에 갔을 때였다. 그건 부상으로 치지 않는다.



루시 리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실력이 아주 출중해서 열 한 살이던 2014년에 U S여자오픈에 출전했던 소녀다. 우리는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친구가 됐다. 내가 증조할머니뻘이라는 걸 생각하면 정말 멋진 일이다. 루시는 지금 열네 살이다. 아직도 체구가 조그맣고 체중은 45kg이 조금 넘는다. 루시도 당연히 볼을 멀리 날리고 싶어 한다. 나는 루시에게 조바심을 내지 말라고 조언해줬다. 아직 성장이 멈춘 게 아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거리는 자연스레 길어질 것이다. 어깨를 최대한 많이 회전하고 힙도 그렇게 하라고 조언했다. 그리고 제발 왼쪽 발꿈치는 자연스럽게 들어 올리라고 했다. 하지만 내가 루시에게 해준 가장 중요한 얘기는 체중을 들어 올리려고 하지 말고 무조건 샷 연습을 많이 하라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골프 체력’을 키우는 것. 실제로 스윙에 사용되는 근육을 단련하는 걸 대체할 수 있는 건 없다. 그러면 근육 기억을 개발하게 된다. 젊은 선수들에게는 이게 필수다.

첫 번째 코치는 조니 벨런트다. 라호야컨트리클럽에서 처음으로 레슨을 받았을 때 그는 유칼립투스 나뭇가지를 하나 꺾어서 내게 건네줬다. “그 가지가 노래를 부르게 해보렴.” 그가 말했다. 가지를 휘두르면서 큰 소리가 나게 하려면 최대한 빨리, 매끄럽지만 강하게 휘둘러야 했다. 정말 탁월한 첫 레슨이 아닐 수 없었다. 볼을 맞히는 게 아니라 그걸 통과해서 스윙하는 느낌을 익힐 수 있었다.

하지만 내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코치는 해리 프레슬러였다. 캘리포니아에서는 여자 골퍼들을 가장 잘 가르치는 교습가로 정평이 나 있었다. 토요일마다 어머니는 자동차로 2시간 30분 거리인 샌가브리엘컨트리클럽으로 나를 태우고 가서 그에게 30분간 레슨을 받게 했다. 사람들이 칭찬해 마지않았던 내 스윙은 사실상 해리의 스윙이었다. 그의 사무실 벽에는 양쪽 허벅지에 벨트를 두르고 양쪽 팔뚝에는 밴드를 감아서 스윙하는 동안 양쪽을 최대한 가깝게 유지해야 한다는 걸 상기하며 연습하는 벤 호건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예전에는 저마다 개인적인 스타일이 있었다는 얘기를 많이 하지만 해리는 단 하나의 뛰어난 스윙이 있다고 철석같이 믿었다. 백스윙을 할 때 클럽은 직각으로. 톱에서는 오른손을 샤프트 밑에서 ‘쟁반’을 든 것처럼. 클럽은 45도 각도로. 다운스윙 중간 지점과 임팩트 그리고 폴로스루에 들어갈 때도 클럽 페이스는 직각으로. 그는 이런 동작을 자연스럽게 취하도록 근육을 단련시키기 위해 직접 자세를 만들어주곤 했다. 내 스윙이 리듬과 템포의 측면에서는 독자적인 스타일을 지녔을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어느 정도 만들어진 것이다. 나는 그 스윙을 평생 유지했고 그건 정말 효과적이었다.

몇 년 후에 베치 롤스와 오스틴컨트리클럽의 연습장에 있을 때 하비 페닉이 지나다가 들어왔다. 하비에게서 지도를 받은 적은 없었지만 내가 거기서 샷을 하는 걸 보고는 몇 가지 조언을 해줬다. 그리고 직접 만든 교습 도구를 건네줬다. 사슬 끝에 묵직한 쇠공을 용접해서 붙여놓은 것이었다. 그립이 있다는 점을 빼면 수감자의 족쇄 같았다. 그는 그게 리듬 개선에 도움이 될 거라면서 “평소처럼 스윙을 해보라”고 했다. 나는 그걸 예전의 유칼립투스 가시처럼 휘둘렀던 것 같다. 공이 떨어져서 연습장 저 너머로 날아갔기 때문이었다. 만약 누가 맞았더라면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하비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건 도움이 안 되겠는데.” 그가 말했다.

열두 살 때 샌디에이고에 있는 미션밸리컨트리클럽에서 프레드 셔먼이라는 프로가 진행한 클리닉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밤에 열린 클리닉에는 많은 사람이 구경을 왔다. 연습장에는 마치 야구장처럼 조명을 환하게 켰다. 행사가 무르익었을 때 프레드는 나를 데리고 나가서 시범을 보이게 했다. “미키, 볼이 멀리 사라지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렴.” 그가 말하면 나는 드라이버 샷을 했고 볼은 조명이 비치는 지점까지 계속 오르막을 그리다가 그 너머로 사라졌다. 나중에 긴 드라이버 샷이 필요할 때면 나는 이렇게 속삭이곤 했다. ‘볼을 사라지게 만들어.’

조명 너머로 드라이버 샷을 넘기면 사람들은 환성을 질렀다. 놀랍게도 나는 그런 관심을 즐겼다. 최고의 골퍼에게는 약간의 과장된 기질, 약간의 허세가 있다고 나는 믿는다. 심지어 수줍음이 많은 골퍼도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지켜보라”는 기질이 있고 그건 그들에게 중요한 자산으로 작용한다. 관심을 받고 재능을 과시하고 이걸 정말 잘할 수 있다는 걸 사람들에게 보여주려는 욕망은 재능이다. 그런 욕망 없이 아주 뛰어난 프로가 된다는 건 생각할 수 없다.

언젠가 내가 어릴 때 할리우드의 엄청난 스타였던 미키 루니와 함께 행사를 연 적이 있다. 그가 내 파트너였고 나는 첫 홀에서 멋진 드라이버 샷으로 페어웨이 중앙을 갈랐다. 갤러리에서 큰 박수가 나왔다. 이제 그의 차례였고 그의 정교하고 복잡한 프리 샷 루틴(웨글, 스트레칭, 심호흡 등등)은 족히 30초가 걸렸다. 관중은 침묵을 지켰다. 마침내 그가 테이크백을 했다. 톱에서 잠시 멈추는가 싶더니 동상처럼 뒤로 넘어갔다. 중간에 움찔하지도 않고, 그야말로 나무가 넘어가듯이 쿵 소리를 내면서 쓰러졌다. 노련한 프로들만이 할 수 있는 계획된 연기였다. 사람들은 속수무책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웨스턴오픈을 제외하면 당시 여자 투어에는 매치플레이가 많지 않았다. 나는 그 기회를 소중히 여겼다. 메달 플레이가 더 월등한 테스트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8타를 두 번 기록하고도 승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은 끝내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게 바로 나였다.

1952년 US여자주니어대회의 결승전에서 바버라 매킨타이어에게 승리를 거뒀을 때 나는 기쁘면서도 그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바버라는 내 친구였고 그 대회의 우승이 그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 나중에 1962년 타이틀홀더스와 1964년 US여자오픈을 플레이오프에서 두 번 모두 같은 상대(루스 제슨)를 누르고 우승했다. 루스가 플레이를 무척 잘했다는 게 더 안타까웠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두 사람의 패배가 아직 마음 한구석에 걸려 있다. 상대방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아무렇지 않게 볼 수 있는 선수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러질 못했다.

하지만 나는 실력에서 우위를 지녔다. 루이즈 서그스와 같은 조가 될 경우, 라운드를 마치고 나면 늘 그의 플레이를 지켜볼 수 있어서 즐거웠다고 말하곤 했다. 그의 스윙은 정말 아름다웠다. “오늘 나를 도와줘서 고마워, 루이즈.” 내가 이렇게 말하면 그는 이런 반응을 보였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도와준 게 없는데.” 그러면 나는 말했다. “아니야, 틀림없이 도와줬어. 너의 스윙이 내 리듬에 큰 도움이 됐거든.” 그러면 그는 웃음을 터트렸다. “아이고, 그것참 안타깝네.”

1954년에 아직 아마추어였던 나는 US여자오픈의 마지막 36홀을 베이브 자하리아스와 같은 조로 플레이하게 됐다. 열아홉 살이던 나는 몸이 후들거릴 정도로 겁이 났다. 느닷없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와 경쟁하게 된 상황을 상상해보라. 베이브의 존재감은 엄청났고 아예 다른 별에서 온 것 같았다. 1년 전에 결장암으로 수술을 받고 복귀했는데도 놀랍도록 강인했다. 팔과 다리의 그런 근육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쇼맨십도 대단해서 갤러리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한 홀에서는 남편인 조지를 불러서 가려달라고 하더니 거들을 벗었다. 순진했던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얼굴을 붉혔지만 베이브는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다. 그는 그걸 갤러리에게 보여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제 내가 샷을 하는 걸 지켜보세요.” 그는 거칠고 강했으며 승부욕이 대단했지만 친절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실력이 대단했다. 그는 장타자로 기억 될 때가 많고, 내가 직접 보기 전까지는 그게 사실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해 US여자오픈에서 두드러진 건 그의 쇼트 게임이었다. 그는 12타 차의 승리를 거뒀다. 나는 17타 뒤진 스코어로 공동 4위를 차지했다. 그의 플레이를 그렇게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는 건 엄청난 특권처럼 여겨졌다. 그런데 2년 후에 그는 세상을 떠났다.

내가 투어에 처음 합류했을 때 우리는 한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자동차 행렬을 이루며 개최지를 찾아다녔다. 힘든 생활이라는 점이 부각될 때가 많지만 나는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 우리는 다들 크고 편안한 캐딜락을 몰았다. 자동차가 지금보다 많지 않을 때여서 교통 정체도 없었다. 나는 그 생활이 즐거웠다.

긴장을 풀고 생각에 잠기면서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라디오도 많이 들었다. 주로 컨트리음악이었지만 엘비스 프레슬리 음악을 자주 틀어주는 방송국을 찾아내곤 했다. 다들 그에게 열광했다. 1956년에 플로리다의 세인트피터즈버그에서 나는 마침내 그의 공연을 보게 됐다. 엄청난 사건이었다. 그때 내 나이가 스물한 살이었고 그는 미국에서 가장 인기가 높았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객석에는 젊은 여자들이 아주 많았고 나 역시 그들처럼 소리를 지르며 공연에 푹 빠졌다.

선수들끼리는 아주 가까웠지만 <그들만의 리그>라는 영화에 비유할 생각은 없다. 그 정도의 연대감, 한 팀 같은 분위기는 없었다. 우리가 일종의 개별적인 프리랜서라는 걸 유념해야 한다. 골프는 개인 스포츠의 최고봉이다. 어디서나 친절함이 넘치고 퍼팅 조언을 해주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가족 같은 분위기라고 말하는 건 조금 과하다. 그것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운동선수에게는 실력이 절정에 달하는 순간, 아주 짧은 기간이 있는 것 같다. 기술과 그걸 구사하는 능력이 최고에 이르는 순간. 내게는 그게 1957년 시아일랜드오픈 마지막 라운드의 16번홀이었다. 근소한 차이로 선두를 달리고 있던 나는 커다란 벙커가 앞을 막고 있는 그린을 향해 2번 아이언 샷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기온은 8.8도였고, 바람은 시속 36km로 불어서 이루 말할 수 없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롱 아이언은 늘 내 강점이었고, 볼이 3m 앞에서 멈췄을 때 팔에 소름이 돋았다. 거의 초현실적인 느낌이었다. 샷은 내가 머릿속에 그렸던 그대로 구현됐고 타격과 볼의 경로, 탄도와 휘어지는 라인까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나는 그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위대한 승리라고는 할 수 없지만 선수 생활 내내 그 샷의 느낌을 재현하려고 노력했다.

나는 롱 아이언 샷의 난이도를 즐겼지만 가장 좋아한 클럽은 6번 아이언이었다. 대부분의 선수에겐 가장 좋아하는 클럽, 셋업을 할 때 다른 클럽보다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 클럽이 있다. 내게는 그게 윌슨 스태프 다이너파워 아이언 세트(1963년 모델)의 6번 아이언이었다. 은퇴한 후에도 오랫동안 이 클럽을 가지고 집 뒤로 잠깐씩 플레이를 나가곤 했다. 거리 컨트롤이 뛰어나서 파를 하기에 완벽한 클럽이었다. 나는 티 샷과 어프로치 샷을 그 클럽 하나로 구사했다. 5번 아이언은 너무 과하고 7번 아이언은 충분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 클럽이 부러졌다. 헤드가 날아갔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수리할 수 없었다. 정말 슬픈 날이었다. 그건 지금 USGA 박물관에 형제자매들과 함께 전시되어 있다.

실력이 정점에 오르면 나는 이른바 ‘안개’ 속으로 빠지곤 했다. 요즘은 그걸 ‘경지’라고 부르는 모양이던데 어쩌면 그것과 비슷할지 모르겠다. 나는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건 집중이 정말 잘되고 평소보다 강한 자신감으로 플레이할 수 있는 상태였다. 1964년에 루이스빌에 있는 헌팅크리크에서 62타를 기록했을 때 바로 그런 상태였다. 뭐라고 설명하긴 어렵지만 아무튼 내가 최고의 실력을 발휘했을 때였다.

대회에 부분적으로만 참가하기 시작한 1969년에 나는 겨우 서른네 살이었다. 댈러스로 이사 간 직후인 1960년에 나는 얼 스튜어트의 초대로 오크클리프컨트리클럽에서 플레이하고 그곳을 홈 코스로 삼았다. 얼은 뛰어난 코치이자 환상적인 골퍼였다. 내가 알기로는 자신의 홈 코스에서 열린 PGA투어에서 우승한 마지막 상임 클럽 프로였다. 나는 얼과 플레이를 많이 했다. 우리는 긴장감을 높이기 위해 50센트를 걸고 매치를 했고 그가 2번 아이언으로 티 샷을 하고 나는 드라이버 샷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이긴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나는 얼에게 내 스윙에 대해 평가해달라고 간청했다. 그는 완강하게 거절했다. “당신은 플레이를 해야 해요. 그건 단지 스윙의 차원이 아니고 코스 전략의 문제예요.” 그는 정말 지혜로웠고 스윙의 책임감, 나쁜 샷과 좋은 샷을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에 대해 일깨워줬다. 나는 얼을 정말 존경했다. 그리고 그를 기쁘게 해주고 싶었다.

1961년에 LPGA투어에서 10승을 거뒀다. 오크클리프로 돌아왔을 때 얼이 칭찬을 해줄 줄 알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상당히 좋은 성적이지만 그래도 모든 대회에서 우승했어야지.” 농담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노력을 배가했다. 1962년에도 10승을, 1963년에는 13승을 거뒀다. 집에 돌아갈 때마다 얼은 말했다. “충분하지 않아. 출전하는 모든 대회에서 우승해야 해.” 긴 이야기를 짧게 줄이자면, 1961년부터 4년 동안 나는 여덟 번의 메이저 챔피언십을 포함해 총 44개 토너먼트에서 우승했다. 그 기간 중의 2년 동안은 LPGA 선수협의회장을 맡아 모든 칵테일파티와 로터리클럽 대회에도 참가했다. 얼과 LPGA, 아버지와 대중의 기대에 부응하려는 노력은 내 몸과 마음을 지치게 했다. 결국 궤양이 생겼고 온갖 불안 증세에 시달렸다. 연차가 문제가 아니라 총주행거리의 문제였다.

나는 노력을 계속했지만 1969년에 발목 부상으로 한쪽 다리에 깁스를 한 채 골프를 완전히 떠났다. 두뇌를 활용할 방법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서던메소디스트대학에 입학했다. 대학이 1954년에 1년 다니다가 프로로 전향하면서 그만뒀던 스탠퍼드 시절과 완전히 다르다는 걸 깨닫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커닝을 많이 하는 것도 모두가 명예를 중시하던 스탠퍼드와는 완전히 달랐다. 명예와 자기 규율이 기본이었던 골프의 경험과 딴판인 건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신수학’이라는 학문에도 잘 적응할 수 없었다. A를 받기는 했지만 그걸 위해 쏟아야 하는 노력이 부담스러웠다. 한 학기 만에 내가 가장 잘 아는 곳, 프로 골퍼 생활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후로 1973년까지 준(準)정기적으로 플레이를 계속했다.

얼 스튜어트와 했던 50센트 내기 게임은 일종의 일탈이었다. 나는 친선 라운드에서 내기 게임을 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고상한 척하려는 게 아니다. 다른 내기는 얼마든지 한다. 하지만 골프는 내기를 걸기엔 무척 소중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내게 골프는 신성한 게임이다. 내기를 하면 그걸 조금이나마 더럽힌다는 느낌이 든다. 골프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롭다고 늘 생각했다.



내가 본 중에 가장 순수한 여성 골퍼는 패티 버그(Patty Berg)였다. 그는 게임을 이해했는데, 가능한 한 최고의 스코어를 이끌어내는 놀라운 요령을 가졌다는 뜻이다. 그는 중요한 순간의 퍼팅에 강했다. 페어웨이 우드 샷은 놀라웠으며 내가 본 최고의 샌드 플레이어였다. 특히 한 샷은 내 뇌리에 깊이 각인되었다. 오거스타컨트리클럽에서 열린 1955년 타이틀홀더스챔피언십에서 패티는 13번홀 벙커에 볼을 빠뜨렸다. 급격한 내리막 경사에서 30야드 샷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모래 위의 라이도 썩 좋지 않았다. 그는 이제 끝장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매우 신속하고도 단호한 플레이로 볼을 컵 7~8cm 앞으로 보냈다. 아무리 위대한 프로라고 해도 놀라운 샷이 아닐 수 없었다. 그가 그런 플레이를 하는 걸 나는 수없이 목격했다. 패티의 기량은 역사에서 묻힌 감이 있지만 그를 능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내가 투어를 떠난 후에 가장 주목한 최고의 스윙은 패티 시핸(Patty Sheehan)의 스윙이었다. 리듬이 아름답고 스윙 판을 따라 움직이며 톱에서 직각을 이룬다. 그뿐만 아니라 임팩트 구간을 통과하는 동작도 아름답다. 나는 편지를 즐겨 쓰는 사람이 아닌데도 패티가 1994년 US여자오픈에서 우승했을 때 그의 스윙이 당대 최고라고 생각한다는 내용의 카드를 보냈다. 그가 내 평가를 고마워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요즘 활동하는 선수 중에서는 제시카와 넬리 코르다 자매의 스윙을 정말 좋아한다. 둘 다 아주 특별한 선수들이다.

1960년대에 몇몇 선수들이 골프 스윙 동영상을 찍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현상이 불만이었다. 그건 비판을 위한 작업, 완벽하지 않은 점을 찾아내서 그걸 어떻게 고쳐보려는 시도였다. 그건 끝이 없다. 골프란 결코 완벽할 수 없는 게임이기 때문이다. 좋은 교습가를 찾아가서 그의 조언대로 연습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LPGA의 새로운 복장 규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글쎄, 여성성을 드러내는 것과 노골적인 섹스어필의 경계는 미세하다. 내가 선수 생활을 막 시작했을 때만 해도 LPGA는 남성적이라는 인식과 맞서 싸웠다. 선수들은 더 여성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얀 스티븐슨과 로라 바우가 대표적이다. 남자들이 그들을 섹시하다고 보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지만 그들은 단지 여성적이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매력적이었다. 그건 억지로 꾸민게 아니라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요즘의 몇몇 선수들은 섹시한 면을 억지로 꾸미는 것처럼 보인다. 남자 전용 클럽이 아닌 골프 토너먼트의 본모습을 되찾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LPGA의 드레스 코드에 찬성한다. 우리 선수들을 매력적인 여자로 보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US여자주니어대회에서 컨시드를 받기 전에 짧은 퍼팅을 치워버린 엘리자베스 문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너무나 안타까운 상황이었다. 이런 내 마음이 엘리자베스에게 전해졌으면 좋겠다. 규칙이 가혹하다고 생각될 수도 있지만 중요한 건 그가 자신의 실수를 책임지는 모습이 아주 사랑스러웠다는 것이다. 나는 그와 맞대결을 펼쳤던 에리카 셰퍼드라는 소녀도 응원한다. 둘 다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길 바란다. 이런 가혹한 결과에 경쟁자들의 성품이 잘 드러나는 건 오로지 골프밖에 없다. 다른 종목이었다면 이 어린 선수들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 수 있는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최근에 열린 US여자아마추어대회를 많이 시청했다. 샌디에이고컨트리클럽은 멋진 코스일 뿐만 아니라 내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이다. 파4인 18번홀에서 캘리포니아 출신인 헤일리 무어는 드라이버 샷을 강타한 후 그린까지 웨지 샷을 남겨놓았다. 전성기 시절의 나였다면 2번 아이언이 필요했을 것이다. 현대 장비와 거리의 문제점은 (누구도 이 점을 지적하지 않는 것 같은데) 선수들에게서 경험을 빼앗는다는 것이다. 2번 아이언을 손에 쥐었을 때 나는 전략적인 선택을 해야 했다. 볼을 어느 쪽으로 휘어지게 할까? 높이는 어느 정도가 좋을까? 혹시 페어웨이 우드로 샷을 해야 하는 게 아닐까? 헤일리에겐 사실상 한 가지 선택밖에 없었다. 웨지 샷을 하는 것. 그러므로 플레이를 지켜보는 건 흥미롭고 앞으로도 그럴 테지만, 선수 입장에서는 머리 쓸 일이 줄어들었다.

퍼팅을 실패한 후 엉덩이에 손을 올린 채 서 있는 젊은 선수를 보면 TV화면 속으로 뛰어들어가서 내가 투어에 막 진출했을 때 베치 롤스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잔소리를 해주고 싶은 생각이 든다. 나는 그때 이미 뛰어난 볼 스트라이커였기 때문에 샷을 나보다 못하면서도 칩 샷과 퍼팅을 더 잘하는 상대에게 질 때마다 속이 상했다. 내가 볼 스트라이킹이 더 뛰어나기 때문에 그만큼 더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오만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베치에게 이런 불평을 얼마나 털어놓았을까, 그는 급기야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볼을 더 적은 타수 만에 홀에 집어넣는 것이 이 게임의 기본이라는 점을 일깨워줬다. 간단한 사실이지만, 볼 스트라이킹의 고수들은 종종 이걸 잊곤 한다. 그다음에는 내게 모든 샷의 책임을 스스로 져야 하며 자기 연민에 빠지는 걸 그만하라고 말했다. 연민을 그만두자마자 나는 우승을 하기 시작했다. 그가 아니었다면 아마 몇몇 대회에서는 우승했을 테지만, 82승까지 도달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고 나는 확신한다.

천국에도 골프는 있어야 한다. 그곳에 갔을 때 내 손에 2번 아이언이 들려 있었으면 좋겠다. 어쩌면 천사들이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왕년의 시아일랜드골프클럽처럼 모든 게 고요하고 아름다울 것이다. 그곳에서도 나는 내 샷이 철통 방어를 뚫고 그린에 오르는 걸 지켜보면서 1957년의 그 샷을 재현하려 할 것이다. 만약 그 곳이 진짜로 천국이라면 나는 그 퍼팅에 성공할 것이다.

글_가이 요콤(Guy Yocom)

미키 라이트. 마이 샷 / 82세 / 포트세인트루시 / 플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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