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포스의 승리 [Feature :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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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포스의 승리 [Feature : 1711]
  • 김기찬
  • 승인 2017.11.21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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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포스의 승리 [Feature : 1711]


지진으로 폐허가 된 아이티에서 맨손으로 골프 재건에 나선 사나이. 실베인 코트는 불굴의 의지로 아이티의 유일한 코스를 되살려냈다.

발밑이 흔들렸을 때 실베인 코트는 동네 식품점의 냉동식품 코너 앞에 있었다. 진동은 더 심하고 빨라졌다. 작은 진동은 전에도 두 번쯤 겪은 적이 있지만 이 정도 규모는 처음이었다. 건물이 좌우로 흔들리자 그는 이게 큰 지진이라는 걸 알았다. 그는 정육 코너 근처의 철제 들보 밑의 기둥에 몸을 기댄 채 기다렸다. “내 인생에서 가장 긴 45초였다”고 그는 회상했다.

2010년 1월12일, 오후 5시가 조금 안 됐을 때 리히터 규모 7.0의 강진이 아이티를 강타해서 30만 명이 사망하고 그보다 훨씬 많은 부상자가 발생했다. 진원지는 수도인 포르토프랭스에서 남서쪽으로 약 25km 떨어진 지점이었다. 코트가 사는 곳에서 멀지 않았다.

부서진 잔해를 넘어서 기다시피 올림픽마켓을 빠져나왔더니 밖에는 건물이 무너지면서 피어난 먼지구름이 자욱했다. 그가 8km를 운전해서 집으로 가는 데는 4시간이 넘게 걸렸다. 집은 그대로였고 아내와 당시 세 살이던 딸도 무사했다. 모두가 그렇게 운이 좋았던 건 아니었다. 100만 명이 넘는 이재민이 발생했고 이미 남반구에서 가장 가난하고 재해가 심했던 나라는 더욱 힘든 상황에 처했다. 이 지역에서 200년 만에 발생한 최악의 지진이었다.

더 많은 건물의 붕괴를 우려한 수천 명의 시민이 산비탈의 상업지구에 위치한 페티옹빌테니스앤골프클럽의 페어웨이로 몰려나왔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코트가 속한 회원제 나인 홀 코스를 점거한 사람들의 수는 5만 5000명을 넘어섰고 그곳은 아이티에서 가장 규모가 큰 ‘천막촌’으로 변했다. 이재민들은 침대보와 방수포, 타이어, 합판, 철판에 이르기까지 되는 대로 가져다가 지낼 곳을 만들었고 한 양동이에 8센트인 물을 타기 위해 줄을 섰다.

코트는 원래 캐나다가 고향이지만 1998년에 사업상 단기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위해 아이티로 이주했다. 그 일은 본업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페티옹빌에서 정기적으로 플레이를 하게 됐다. 1934년에 문을 연 페티옹빌은 카리브해 일대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골프 클럽이었다. 지진은 전 세계에서 골퍼들이 찾아오는 카사데캄포와 푼타카나 등이 포진한 도미니카공화국과의 국경을 따라 넓게 관측됐다. 반면 아이티에서 플레이할 곳은 페티옹빌뿐이다.

약 300명 정도인 페티옹빌의 회원들은 이재민들을 내쫓는 건 비인도적일 뿐만 아니라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런 참담한 상황은 처음 봤다.” 코트는 말했다. 몇 년이 지나도록 56에이커에 달하는 클럽은 더 많은 사람을 위해 사용됐다. 수영장의 물을 뺐고 여덟 개의 테니스 코트는 음식과 물, 의료용품을 보관하는 창고로 쓰였다. 사회 참여에 적극적인 배우 숀 펜의 비영리 기구인 J/P아이티구제기구는 이곳에 조금이나마 질서를 되찾아줬다. 숀 펜의 임시 사무실이 9번 그린 옆에 세워졌고 바로 옆에는 임시 약국이 만들어졌다. 4번홀에 세운 청백색 줄무늬의 서커스 텐트 안에서는 예배를 봤다. 5번홀은 초등학교가 됐고 2번홀의 페어웨이였던 곳에는 임시 병원과 은행, 이발소 그리고 네일숍이 생겨났다.

정상적인 클럽 활동을 재개하자는 생각이 조금씩 깜빡이기 시작한 건 2013년이었다. 국제이주기구와 아이티 정부의 도움으로 국내 이재민들은 이전과 집 마련 보조금으로 500달러를 받았다. 모든 가족이 철거하고 천막촌을 해체하기까지는 18개월이 걸렸다.



골프 코스는 폐허가 되어 있었다. 클럽 이사회는 코스를 재건하지 않기로 했다. 그건 너무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라고 그들은 말했다. 코트가 이사회에서 자비로 코스를 복구해보겠다고 말했을 때 그들의 반응은 “마음대로 하되, 우리에게 도움을 청할 생각은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코트는 이 나라의 골프가 그대로 사장되는 걸 지켜만 보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12명의 캐디와 예전의 코스 인부들로 팀을 꾸렸고 맨손으로 한 번에 한 홀씩 코스를 다시 만들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착수한 작업은 쓰레기를 모아서 소각하고 산더미처럼 쌓인 철과 고무를 폐기하는 일이었다. 3년이 넘게 매주 토요일마다 코트는 아침 8시에 코스에 나가서 일을 할당했다. 그가 직접 삽을 들고 수레를 채우는 걸 본 인부들은 그가 진심이라는 걸 알았다. “이건 우리 모두의 프로젝트였다.” 코트는 말했다. “그들은 무척이나 헌신적이었고 복원에 일조한다는 걸 자랑스러워했다. 힘든 일은 그들이 다했고 나는 그저 진두지휘를 맡았을 뿐이다.” 코트가 출근하는 주중에는 베테랑 캐디 마스터가 관리를 맡아서 코트의 지시 사항을 수행했다.

그들은 클럽하우스에서 가장 가까운 고원에 위치한 9번홀부터 공략했다. 주차장으로 쓰였던 페어웨이를 60cm의 자갈로 덮었다. 유일한 기계였던 굴착기로 바위를 치우고 송수관을 제거했으며, 가로등 지지대로 사용된 커다란 시멘트 블록 세 개도 치웠다. 이 홀의 작업을 완수하는 데만 거의 1년이 걸렸다.

코트는 레이아웃을 새로 만드는 대신 상상력을 발휘했다. 예전의 1번과 2번 홀의 부지를 조금 잃은 터라 코트는 이중 그린을 만들었다. 또 다른 그린에는 마이애미의 마트에서 사온 벤트그라스를 뿌렸다. 그 외에는 토종 잔디를 옮겨 심었다. 전부 더해서 네 개의 티잉 그라운드를 새로 추가했다. 9번홀에는 돌담을 세우고 그린을 엄호 할 벙커도 하나 만들었다. 파 64. 이제 쉰 살이 된 코트의 베스트 스코어는 66타다.

코트와 그의 팀은 카리브해의 ‘아일랜드 타임’이라는 전통에 새로운 숨을 불어넣었다. 완공까지 정해진 일정 같은 건 없었고 그저 계속되는 화창한 날씨의 예보가 작업에 도움을 주리라고 믿었다. 코스를 복원하는 데 걸린 3년 동안 코트는 지속적인 급여의 약속과 예전에 하던 일자리를 되찾을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인부들에게 동기를 부여했다. 그는 3만 달러의 사비를 출연하고 1만 달러를 모금했다. 플레이할 공간을 되찾으려는 것도 있었지만 그는 코스의 복원이 같은 목적을 지닌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사회적 실험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이 프로젝트는 나의 추진력이었고 아이티를 떠나지 않을 이유였다.” 그는 말했다. 그의 삶에서 클럽은 사교적 중심이라는 자리를 되찾았다. “회원들과 직원들은 대가족 같다.” 코트는 말했다. 그는 한 해에 50회 이상의 라운드를 소화할 뿐만 아니라 수영장에서 수영하고 도서관에서 책도 읽는다.

2016년 5월에 페티옹빌의 골프 코스가 재개장했을 때 클럽은 스크램블 토너먼트를 개최하고 직원들을 참가비 없이 참가하게 했다. 바비큐 잔치가 열렸을 때 한 클럽 회원이 코트에게 다가왔다. “당신이 해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의 말에 코트는 그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글_애덤 슈팩(Adam Schup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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