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마스터스, 타이거 우즈의 클래스 [Feature :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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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마스터스, 타이거 우즈의 클래스 [Feature : 1704]
  • 김기찬
  • 승인 2017.04.05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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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마스터스, 타이거 우즈의 클래스 [Feature : 1704]


20년 전 타이거가 거둔 12타 차 승리는 마스터스와 골프를 어떻게 바꿨나.

 

글_톰 캘러핸(Tom Callahan)

 

그게 어떻게 끝났는지는 모두가 기억하지만 정확하게 언제 시작됐는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혹자는 1997년 마스터스를 한 주 앞두고 마크 오마라와 연습 라운드를 하던 타이거 우즈가 파5홀 두 곳에서의 버디를 내버려둔 채 아일워스에서 59타를 했던 때에 시계를 맞추기도 한다. 올랜도에서 오거스타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두 친구는 이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랜드슬램을 하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스물한 살의 우즈는 당시 메이저 챔피언십에 쉰네 번 출전해 한 번도 우승을 거두지 못한 상태였던 마흔 살의 오마라에게 물었다. 그는 우즈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했다. ‘니클라우스 이후로 그런 질문을 하는 건 자네가 처음이야.’ 하지만 그 생각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비현실적이지.” 오마라는 한참 후에야 대답했다. “나는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우즈가 말했다.

 

역사상 그 어느 대회보다 강렬한 인상을 남긴 토너먼트 자체는 20년 전인 4월10일에 시작해서 13일에 대단원의 막을 내렸는데 세찬 바람이 불어서 솔잎이 흩날렸던 목요일에는 제일 먼저 플레이에 나선 서른 명의 선수가 곧바로 오버파를 기록했다. 프로 무대에서 3승을 거두고 있었지만 여전히 US 아마추어 타이틀을 보유 중이었던 우즈는 전통에 따라 전년 챔피언인 닉 팔도와 같은 조로 편성됐다. 우즈는 전반에 40타를 기록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그가 재기의 발판으로 삼은 10번홀의 버디 또는 세베의 마흔 번째 생일이었던 그 전날 바예스테로스와 호세 마리아 올라사발의 연습 라운드를 절반쯤 같이 했던 것부터 시작해 볼 수도 있다. 세베가 가르쳐준 ‘몇 가지 소소한 것들’을 시도해보겠다며 스페인 선수들과 헤어진 타이거는 그날 저녁에 이렇게 말했다.

 

“그린 주변에서 그가 구사하는 플레이는 놀라워요. 다른 선수들이 하는 걸 봐야만 배울 수

있는 것들이 있죠.”

 

현장에 있었지만 TV로 시청하는 걸 더 좋아해서 갤러리 사이에는 없었던 얼 우즈는 타이거가 12번홀에서 칩 샷을 그대로 홀인시키며 첫 라운드에서 부활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아들보다 더 감상적이었던 얼은 그게 세베에게 배운 천재적인 스트로크 가운데 하나인지 궁금했다. “왜 그래요, 팝. 너무 앞서가지 말아요.”

 

심장 수술을 받고 회복 중이던 얼은 대회 기간 빌려서 생활하던 집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고 타이거는 아버지를 깨울 마음이 나지 않았다.

 

“아빠.” 결국 나직하게 아버지를 불렀고 그 소리에 얼은 깜짝 놀라 일어났다. 타이거가 예전부터 사용하지 않던 호칭이었다. “제 스트로크가 마음에 들었어요?”

 

“아니다.” 얼은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과 노래를 부르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따금 타이거를 웃게 만드는 목소리였지만 이때는 아니었다.

 

“뭐가 잘못됐는데요?”

 

“테이크어웨이에서 오른손이 아주 조금 구부러졌어.” 얼은 침대에 누웠고 타이거는 카펫 위에서 퍼팅을 계속했다.

 

두 사람은 앞선 해에(어쩌면 그보다 한 해 전일지도 모른다) 오거스타의 골프다이제스트 숙소에서 나란히 앉아 바비큐 접시를 무릎에 올려놓은 채 오픈과 인비테이셔널에 대해 오가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인비테이셔널은”… 타이거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는데, 통렬하다기보다는 담담한 말투였다. “오픈과 딴판이지.”

 

스탠퍼드에서 해야 할 공부의 양에 따라 아마추어 선수 자격으로 출전했던 두 번의 마스터스에서는 컷 통과와 탈락이 엇갈렸다. 까마귀 둥지로 더 잘 알려진 클럽하우스 다락방에 머물던 타이거는 잠을 이룰 수 없었고(“나는 잠을 잘 잔 적이 한 번도 없어요”라고 그는 말했다) 한밤중에 일어나 낯선 복도를 거닐며 유명한 전설의 유령들과 교감을 나눴다.

 

“그곳에서는 그림자들이 벽을 따라 흘러다녀요.” 그는 말했다. “그 다락방에는 귀신들이 산다고요.”

 

불을 켜기가 두려웠던 그가 무심코 들어간 곳은 챔피언의 라커룸이었다. 그는 어둠 속에서 1956년도 우승자였던 재키 버크의 라커 앞에 앉아 그가 살아온 여정을 돌아봤다.

 

우즈는 리 엘더가 마스터스에서 40년간 이어진 인종차별 정책의 사슬을 끊어버린 1975년에 태어났다. 1974년에 클리퍼드 로버츠 회장은 기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오거스타의 캐디 출신인 짐 덴트가 머잖아 PGA투어 대회에서 우승한다면 1972년에 정해진 규정에 따라 토너먼트 출전 자격을 얻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피력했다.

 

로버츠와 보비 존스가 1894년이나 1902년에 태어났던 평범한 미국 사람들보다 더 편협했다고는 볼 수 없지만 그렇다고 차별 철폐 정책을 옹호하지도 않았다. 그들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미국프로골프협회는 1961년까지 ‘코카서스 인종의 프로 골퍼’라는 몰상식한 어구를 조직의 강령에서 삭제하지 않았고 언론용 가이드에 수록된 찰리 시퍼드의 이름 뒤에는 ‘프로 전향 1948년, PGA투어 입회 1961년’이라는 슬픈 꼬리표가 붙었다.

 

물론 마스터스 챔피언들은 집단행동을 통해 시퍼드나 그 누구라도 토너먼트에 초청할 수 있었다. 그들에게는 한 자리를 채울 권한이 있었다. 1969년에 마흔여섯 살이던 시퍼드는 2년 전에 차지한 그레이터하트퍼드오픈 타이틀에 이어 로스앤젤레스오픈에서도 우승을 거뒀다.(같은 날 제츠가 슈퍼볼에서 콜츠를 이겼다) 1959년도 마스터스 챔피언인 아트 월 주니어는 시퍼드에 대한 옹호 여론을 형성하려고 노력했다. 찰리는 단 한 표만 얻었고 그건 월의 표였다.

 

엘더는 모두 결과가 어떻게 될지 짐작하던 일요일에 1997년 마스터스를 보러 현장을 찾았는데 그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시퍼드가 오지 않은 건 그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우즈에게 이런 팩스를 보내기는 했다. “핀마다 공략할 생각은 하지 말게. 신중해야 해. 영리하게 굴고. 코스에 맞는 플레이를 하게. 하지만 때가 되면 다 쏟아내게. 거침없이 공격해. 강하게, 자네의 진면목을 발휘해.”



마코의 응원과 자극

 

목요일에 12번홀에서 칩 샷을 그대로 홀인시킨 우즈는 파5홀인 13번홀에서 버디를 잡으며 1오버파로 내려갔다. 14번홀에서 파를 기록하고 파5홀인 15번홀 티잉 그라운드에 올라섰을 때는 플레이가 너무 지체된 탓에 바로 앞에서 대기 중이던 오마라와 마주쳤다.

 

투어에서 가장 가까웠던 플로리다의 이웃인 그를 우즈는 ‘마코’라고 불렀는데 그의 아내인 얼리샤는 남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어린 친구가 안쓰럽게도 집에 혼자 앉아 있는 모양인데 불러서 저녁이나 같이 먹어요.”

 

마크는 말했다. “타이거는 멋진 차가 있었지만 거의 1년 가까이 세차를 하질 않더군. 나는 그에게 전화를 걸어서 이렇게 말했지. ‘그 더러운 걸 끌고 이리로 와. 내가 지금 세차 중이니까 자네 차도 깨끗이 닦고 왁스까지 칠해줄테니.’” 두 사람의 우정은 그렇게 시작됐다.

 

“마코는 내게 맏형 같은 존재가 되었죠.” 우즈의 말이다. “그는 코스 밖의 인생에 대해 많은 걸 가르쳐주었어요. 아무튼 그러려고 노력했죠. 그중에 어떤 것들, 이를테면 언론을 상대하는 법 같은 것들은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었어요. 하지만 그의 도움이 없었다면 초반의 그런 성공은 결코 거두지 못했을 것입니다.”

 

15번홀의 티 박스에 있는 작은 나무 벤치에 앉아 지체가 해소되길 기다리던 우즈 옆으로 오마라가 다가왔다. 한동안은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전주에 마크가 59타에 패해서 65달러를 건네줄 때 우즈는 평소처럼 그를 짓궂게 놀렸다. “아니, 마크, 대체 몇 타를 친 거예요? 한 87타?” 그리고 여기서 그때의 농담을 뒤늦게 이어가듯이 오마라는 짐짓 분개한 듯이 말했다. “그냥 나를 상대로 플레이하는 것처럼 생각하지 그래? 아직 나를 상대로는 플레이를 잘못했던 적이 없잖아.”

 

우즈는 15번홀에서 이글을 기록했다(피칭 웨지로 처리한 그의 세컨드 샷은 홀 1.8m 앞에 멈췄다). 그러면서 언더파가 됐다. 그리고 17번 홀에서 버디를 잡았다. 전반의 40타를 30타로 뒤집으면서 선두인 존 휴스턴과의 격차가 3타차로 줄었다. 팔도는 이렇게 말했다. “1995년에 타이거와 연습 라운드를 잠깐 같이 해본 적이 있지만 이제야 사람들이 왜 흥분하는지 완전히 이해했어요. 그는 정말 대단해요.”

 

“닉과 나는 코스에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눴어요.” 우즈의 말이다. “아무튼 내가 듣기로 그가 대부분의 사람과 나누는 대화보다는 많았어요. 그게 나였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에게는 해줄 말이 많았어요(하지만 75-81타로 컷 탈락한 이때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간단하게. 그냥 편하게. 그는 함께 플레이하기에 좋은 선수예요.”

 

금요일에는 팔도 대신 폴 에이징어가 우즈 옆에서 플레이했다. “그가 샷을 하는 모습을 직접 본 건 처음이었어요.” 에이징어는 1번홀에서 기록한 더블보기에 골몰한 나머지 우즈가 파5인 2번홀에서 드라이버 샷을 할 때에야 비로소 그의 플레이를 직접 보았다.

 

“마치 딴 세상에 온 것 같은 느낌이었죠.” 에이징어는 말했다. “뭐랄까, 총알 같은 샷이 왼쪽의 아주 큰 나무와 그보다 작은 나무 사이를 말도 안 되게 통과했습니다. 아주 빠르게 날아간 볼은 계속해서 상승 곡선을 그렸죠. 영원히 하늘에 떠 있는 것 같더니 결국 언덕 아래로 사라졌고 이제껏 아무도 도달한 적이 없는 곳에 떨어졌습니다.” 에이징어와 그의 캐디는 서로를 쳐다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우즈는 그날 66타를 기록했다(에이징어는 73타). 13번홀에서 우즈는 다시 한 번 이글을 기록했고(8번 아이언 샷을 6m 앞으로 보냈다), 역사에 대한 감각이 남달랐던 캐스터 짐 낸츠는 CBS 중계석의 파트너인 켄 벤투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켄, 기록을 남기기 위해 말하는건데 4월11일 금요일 오후 5시30분을 조금 넘은 시각에 타이거가 마스터스에서 처음으로 선두에 나섰습니다.”

 

그날의 플레이가 다 끝났을 때 우즈는 스코틀랜드의 콜린 몽고메리를 3타 차로 앞섰으며 에이징어와 헤어지고 몽고메리를 맞이했다. ‘미세스 다웃파이어’와 ‘빌리 번터’라는 별명으로도 유명했던 몽고메리는 유러피언투어에서 여덟 차례나 상금왕을 차지했으면서도 여전히 악평에 시달리고 있었다. 사과처럼 빨간 볼과 곱슬머리 때문에 어른이 된 우량아 같은 인상이었다. 영국의 만화 캐릭터인 빌리 번터는 밉살맞고 뚱뚱하고(끈적거리는 빵을 특히 좋아하며) 잘난 척하며 허세를 부리고 늘 자기만 옳다고 생각하는 꼬마였다.

 

“긴장이 고조되고 있어요.” 몽고메리는 금요일 밤에 말했다. “그리고 메이저 챔피언십의 경험은 내가 훨씬 더 많다고요.”

 

“그 말은 내게 확실한 동기부여가 되었죠.” 우즈는 말했다. “그가 메이저 대회에서 경험이 더 많은 건 의심할 나위가 없었어요. (그건 전부 마찬가지였다. 타이거가 프로로 전향한 후에 참가한 메이저 대회는 이때가 처음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메이저 대회에서 한 번도 우승하지 못했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어요.

 

메이저 챔피언십에서 우승을 해본 적이 있는 선수가 그 말을 했다면 그냥 넘어갔을 겁니다. 그런데 우승을 해보지 못한 건 그도 똑같았기 때문에 우리 둘 다 백지상태에서 출발하는 걸로 생각했어요.”

 

우즈의 3라운드 스코어는 65타였고 74타를 기록한 몽고메리는 프레스룸 뒷문에서 그냥 가도 된다는 제안을 물리친 채 마이크 앞에 서겠다고 자처했다. 그 순간은 메이저 대회 우승 경력이 없는 그의 선수 인생에서 가장 매력적인 등장이었다.

 

“오늘은 짧은 코멘트밖에 할 말이 없네요.” 그는 시련으로 단련된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럴 확률은 없어요. 우리는 모두 인간인데 인간적으로 타이거가 이번 대회에서 패할 확률은 전혀 없다고요. 그건 불가능합니다.”

 

불과 12개월 전에 그레그 노먼(‘허수아비 신세’)과 팔도 사이에 있었던 열한 번의 스윙을 떠올렸는지 누군가 이렇게 물었다.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죠?”

 

“지금 도착했나요?” 몽고메리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어디 다녀왔어요? 휴가 중이었나요?”

 

몽고메리는 우즈의 샷이 ‘길고 곧다’는 걸 알았다. 우즈의 아이언 샷이 ‘매우 정교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퍼팅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이런 것들을 종합해봤을 때 타이거는 현재 (이탈리아 출신인 코스탄티노 로카에게) 9타 앞서 있는데 내일은 더 격차가 더 벌어질거라고 확신한다.”

 

어쨌거나 “팔도는 2위에 안주하지 않고 그레그 노먼은 타이거 우즈가 아니다.”



경주를 끝내다

 

대회가 없는 날 밤이면 무하마드 알리는 조금 얼룩덜룩하게 보이기도 했다. 링에서 경기 시작종이 울리길 기다릴 때의 안색에서는 다가올 풍경이 엿보일 때도 있었다. 하지만 아프리카에서 조지 포먼과 경기를 치렀을 때 한쪽 코너에 혼자 서서 자이르의 긴 국가가 끝나길 기다리던 알리는 구리 주전자처럼 빛났다. 일요일 아침에 우즈가 그랬다.

 

전날 밤늦게 아이스크림을 함께 먹던 얼은 아들에게 이렇게 충고했다. “앞으로도 네가 플레이할 모든 골프 라운드 중 가장 어렵고 또 가장 보람 있는 라운드가 될 거야.”

 

“내가 도착했을 때 타이거는 연습장을 막 떠나려는 참이었어요.” 당시에 예순두 살이던 엘더는 말했다. “나는 그에게 한 주 내내 했던대로만 하면 모든 게 잘 풀릴 거라고 말했어요.” 그를 포옹하며 우즈는 낮게 속삭였다. “이걸 가능하게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고는 연습 그린에서 첫 홀의 티잉 그라운드로 걸어가며 자신을 채근했다. ‘이 경주를 끝내자.’ 그 후 네 시간 동안 타이거는 그 말을 거듭 되뇌었다.

 

일요일 스코어는 상업적인 측면에서 영리한 69타였고 맹렬한 스윙을 하는 우즈에게 손을 뻗었던 꼬마에게 벌어질 뻔했던 재앙을 아슬아슬하게 피해간 걸 제외한다면 위험하다고 할 요인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도 격차는 3타 더 벌어졌다. 니클라우스(1965)와 레이먼드 플로이드(1976)가 세운 271타의 마스터스 기록은 1타 줄어들었고 2위인 톰 카이트는 12타차로 패배했다. 메이저 대회에서 13타 차의 승리를 거둔 유일한 선수는 스코틀랜드의 프레스트윅에서 열렸던 1862년 디오픈챔피언십의 올드 톰 모리스뿐이었다. (영 톰은 12타 차로 우승한 적이 있다.) 프로 데뷔 무대에서 우즈는 이미 역사의 시발점으로 발을 내디디고 있었다.

 

드라이브 샷 거리에서 1위(평균 323.1야드로 2위인 스콧 매캐런과 무려 25야드 차이), 그린적중률에서는 공동 1위(카이트, 프레드 펑크와 72홀 가운데 52홀) 그리고 스리퍼팅에서는 ‘0’을 기록한 톰은 골프계의 지형을 뒤흔들며 오거스타내셔널의 공간을 넘어 경계와 능력까지 위협했다. 그가 일반적으로 어프로치 샷에 이용한 클럽은 전혀 일반적이지 않았다.

 

열여덟 번 중 열한 번을 웨지로 어프로치를 시도했고 파5홀에서는 어김없이 투온을 했다. 로카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1번 아이언으로 샷을 할 때 그는 바람을 거슬러 6번 아이언 샷을 했어요(파3홀인 4번홀에서). 그리고 8번홀에서는 드라이버 샷이 너무 길어서 4번 아이언으로 그린을 노렸습니다. 조금 왼쪽으로 치우쳤지만 다시 4번 아이언으로 낮게 굴러가는 샷을 구사해서 60cm 버디 퍼팅 상황을 만들었죠. 두 번을 연이어 4번 아이언 샷을 하다니. 정말 남달랐어요.” (로카는 75타를 기록했지만 온종일 “앞에 엎드려요!”라는 외침을 들었던 것이 헛되지 않았다. 같은 해 9월에 스페인의 발데라마에서 유럽 팀은 라이더컵에서 다시 한 번 미국 팀에게 승리를 거뒀고 코스탄티노는 싱글 매치에서 4&2로 우즈를 물리쳤다.)

 

우즈에게 1997년 마스터스 우승은 조금도 복잡할 게 없었다. “내가 했던 퍼팅은 절대다수가 오르막이었어요. 그건 어프로치 샷을 컨트롤할 수 있었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그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쇼트 아이언으로 어프로치 샷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쇼트 아이언 샷을 했을까요? 드라이버 샷을 잘했기 때문입니다. 퍼팅은 티 박스부터 그린까지 제대로 작동한 모든 플레이의 결과가 반영된 것입니다. 또는 그린부터 티 박스까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아버지는 늘 코스를 거꾸로 생각하라고 가르쳐줬죠.”

 

우즈는 18번홀 그린에서 언덕을 올라 곧장 얼의 품에 안겼다. “그날 가장 감동적이었던 샷은 아버지와 함께 한 마지막 샷이었어요.” 클린턴 대통령은 우즈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다.

 

텍사스 주 킹우드에 있는 집에서 시퍼드는 말했다. “그 대회로 인해 마스터스를 마음에서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어요. 알다시피, 재키 로빈슨이 야구계에서 흑백의 차별을 깬 지 50년이 되었죠. 타이거가 골프 코스에서 모자를 기울일 때마다 내게는 그게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인사처럼 여겨집니다. 그리고 그가 마지막에 아버지를 끌어안았을 땐 눈물이 조금 나더군요. 마지막 홀을 걸어 올라가는 타이거를 보면서 내가 그의 일부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그는 내가 하고 싶었지만 그럴 기회를 얻지 못했던 걸 해냈습니다. 나는 너무 늙어버렸죠. 처음에 내 목표는 네 가지였습니다. PGA투어 대회에 출전하는 것, US오픈에 참가하는 것,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는 것 그리고 마스터스에서 플레이하는 것. 네 가지 중 세 가지를 했으니 그렇게 나쁜 건 아니었어요.”

 

TV로 중계를 지켜본 사람은 골프 토너먼트 사상 최대인 4400만 명이 넘었다. 코스 밖에서는 크고 작은 비극이 벌어졌다. 되파는 배지의 가격이 개당 7000달러까지 치솟자 거물들에게 구해주겠다고 약속했던 70장의 티켓을 구할 수 없었던 현지 사업가 앨런 F. 콜드웰 3세는 12구경 산탄총으로 자살했다.

 

1979년 마스터스와 1984년 US오픈의 챔피언인 퍼지 졸러(Fuzzy Zoeller)는 중계 스태프들을 웃기려는 마음에 우즈에게 다음 챔피언 만찬에서 닭튀김은 내놓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리고 “칼라드 그린이나 뭐든 그들이 내놓을 만한 것도.” (주 : 칼라드 그린은 케일의 일종으로 유색인종이라는 뜻과 발음이 같다는 걸 노린 것이다.) (“우리 타이거는 칼라드 그린이 뭔지 몰라요.” 그의 어머니인 티다는 말했다.)

 

졸러의 치명적인 잘못은 ‘그들’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이었다. 퍼지의 내면 또는 그의 주변 또는 우리 모두의 주변에 도사리고 있던 뭔가가 무심코 나온 것이었다. (그런 것들은 늘 무심코 나오지 않는가?) 사람 좋던 그는 이 실수로 인해 케이마트와의 계약과 사람들을 웃기던 재능을 잃었다.

 

버틀러 캐빈에서 팔도는 우즈에게 그린 재킷을 입혀줬다. 총 네 벌 중에 첫 번째였다. 우즈는 그 후로도 더 크고 더 뛰어난 토너먼트를 펼치지만 믿거나 말거나 이만큼 중요한 대회는 없었다. 우즈가 15타 차의 승리를 거둔 2000년 US오픈에서 깨진 건 올드 톰의 메이저 대회 13타 차 우승 기록만이 아니었다. 그 주에 페블비치에서는 모든 게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윌리 스미스, 윌리 앤더슨 그리고 롱 짐 반스는 각각 101년, 97년 그리고 79년 동안 보유했던 기록을 우즈에게 반납했다.

 

1997년을 더 중요하게 만든 건 한밤중 챔피언의 라커룸처럼 어두웠던 마스터스의 역사였다. 그리고 그린 재킷은 은으로 만든 예쁘장한 우승컵보다 더 실감 나는 상이다.

 

숙소로 돌아와 축하 파티를 벌이던 얼은 타이거를 찾아다니다가 방에서 옷을 다 입은 채 그린 재킷을 껴안고 잠들어 있는 그를 발견했다. (“나는 잠을 제대로 잔 적이 없어요.”) 타이거의 표현을 빌리자면 “곰 인형처럼 끌어안고 잤다”. 그리고 1년 후에 그는 그걸 마크 오마라에게 입혀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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